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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문학 이야기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근대주의로 근대주의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서양의 예술과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일어난 운동을 말합니다. 근대주의에서 

핵심은 이성의 중심주의인데요. 이것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총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등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구조주의 이후에 발생된

해체의 영향을 받았고, 60년~70년대에 프랑스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탈근대주의에 철학적인

기반을 가지고있는 자크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은 다원적이며 탈중심적인데, 이중 탈이성적 이미지의

사고가 큰 특징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리다와 보드리야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등은 탈근대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탈근대주의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는 근, 현대에 지나갔던 다양한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지식인, 역사가, 학자 등 많은 직군에서 그것의 정의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탈근대적인 생각들이 예술과 철학, 비판과 문학, 건축, 역사해석, 문화, 디자인등

많은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탈근대주의와 탈근대성은 조금 다른

구분적인 용어로 사용됩니다. 탈근대주의란 그 시기에 사회와 문화가 접변된 현상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포스트모더니즘의 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에 일어났던 문화운동이고, 경제와 사회, 정치등 대부분의 영역에 

관련을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이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 근대주의의 정의와

이해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 하면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시작된 이성의 중심주의를 말하기도합니다. 

 역사가들과 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개념으로 보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성과 합리성, 진보같은 이상적인 부분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봉하는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특이한 사회적 상황과 경제적 상황에 대한 

결과로써 드러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상황과 특이한 경제현상을 방송매체에 대한 

성장과 후기자본주의 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은 이런 주장들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은 그저 근대주의에 대한 확장요소일 뿐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사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은 객관적인 것인 실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조와 혁신 등에서 시작된 세계화에 대해 문화적인 다원론, 소통, 지식의 생산 등 집중적인

부분의 중심이 잃어가고 상호적으로 연결된 세계사회에서의 원동력으로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이렇게 분립되어 진사회에 대하여 거진이 된 부분의

반작용이나 헤개모 네가 하는 단일화에 대한 응답과 인식으로 분리되어 창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일화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장르나 문체의 틀이 파괴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철학에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가 주는 영향인 것이며, 예술계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주의와 근대주의가 서로 반발한 작용으로 생겨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영역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점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구조주의와 근대주의에 반발작용이 시작지점이었습니다. 구조주의에

대해 대항하고 그런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 목소리는 포스트구조주의로 연결되게 됩니다. 그 결과로

탈근대주의가 생겨났던 것인데요. 실제로 포스트구조주의와 탈근대주의는 서로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탈근대주의에 대해 철학으로 분류하게 되는 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를 뒷받침

하는 많은 이론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탈근대주의는 다양한 것을 추구하였고, 이성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등장하게 된 근대주의가 추구했던 철학적 이야기들에 그치지 않았다고 강조하였는데요. 

칸트의 주장은 정치적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 쪽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미술과 음악이 

대중화되고, 미술에서 나타난 비디오아트와 팝아트, 그리고 음악에서 랩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장르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기존과는 다르고 자율적이며, 매우 다르지만 개성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문학에서는 

전지적인 시점보다 다른 관점의 시점을 채택하였고, 이런 부분 들은 독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분야의 마지막은 약간 여운을 두었고, 독자가 이런 부분을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입니다.    

  3.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분야에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대표적인 논제는 이 사상이 몽매주의를 

부추기며, 굉장히 무의미한 사상이라고 주장했는데요. 노엄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실증적

지식과 분석적 지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과학분야에서 이것을 유명하게 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소칼사건입니다. 앨런소칼이 무의미한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였고 이것은 고의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출판이 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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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국의 도가, 노장사상은 춘추전국시대 이래에 유가사상과 더불어 중국철학에서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입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장자와 노자가 있으며 유가와 함께 성장했는데요. 

오늘은 도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배경 

 도가가상은 노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노자는 초나라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방지역인 초나라는 북방지역 문화와 차이가 많이 났다고 하죠. 논어에서 초나라의 광인을 가장했던 접여라고 하는 

인물이, 정치의 이상을 바라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공자를 만나 지금 정세가 정치 쪽에 관여하는 것은 위험하니

그만두는 쪽을 추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예를 보아 초나라에서 도가적인 사고방식과 연관되었던 인생관들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가사상 역시 이런 지리적 배경으로부터 시작된 것을지도 모릅니다. 

 

2. 성립과 발전

 노자에 실린 글들은 때로는 압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 시로 그것이 전해진 것은 어떤 시기에는 산문으로 적힌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요. 노자의 사상은 노자 개인만의 철학으로는 보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남방지역의 초나라에서 발생되었던 생활철학과 그것을 전하게 된 철학히. 언젠가는 노자에 나타나는 말, 표현으로 

종합되어 응고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철학은 인생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그것이 쌓아진 노옹의 말이다 하여 

추앙되었는데, 나중에는 노자라는 한 인물의 개인 철학처럼 굳어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도가에 대해 알 수 없는 여러 점들이 있는데요. 도가의 사상은 주로 은자의 철학으로 설명되기에 도가사상을 주장했던 

인물의 성격도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이 몰락했던 귀족들 틈에서 생겼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도가의 철학에는 역사와 풍토가운데 생활했던 서민들이 가졌던 지혜도 있지만, 몰락한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조인 노자의 사고방식은 점차 그 사상이 열자, 장자를 거치면서 유심적인 철학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3. 영향

  1) 유가

 도가사상은 유가사상과 함께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노자는 공자보다 선배이며, 일찍 노자를 통해 예를 배워왔다고

알려졌는데요. 이러한 일들은 후세에 유가 사고방식에 매우 대립되며, 논아와 맹자를 보게 되면 노자의 도가사상에 대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없습니다. 맹자시대에 유가사상과 대립하였는데 양주의 도가사상과 묵가사상을 가지고 있는

묵자의 겸애설이 그 이유입니다. 오늘날에 양주는 도가의 일파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논어나 맹자를 보았을 때 노자에 대한 사항은 나타난 바가 없습니다.

당초에 유가와 가장 강하게 대립한 학파는 묵가였는데요. 이런 부분 때문에 중국철학자인 

펑유란은 공자보다 노자가 훨씬 뒤쪽의 전국시대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논어에 어떤 이가 공자에게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 어떠냐고 물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자 무위로써 다스린 

분은 순이다라는 사고방식을 내놓았고, 도를 지녀도 없는듯하고 덕이 실하여도 허한 것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무와 허실은 노자에게서 자주 보이는 대립의 개념입니다. 이렇든 논어에서 노자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노자의 사고방법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2) 문학 

 도가사상이 인간에게 분수를 지키게 하고, 무욕의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또 정치적인 혼란에 있을 때 은둔자로 생활하는 

소극적인 태도 안에서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으며 현상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모순과 마음에 맺힌 어떤 것들을 풀게 하는 지혜도 가르쳤습니다. 

 이런 이유로 도가사상은 후세에 문학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도연명의 시에서 보면 인생의 훌륭한 지혜를 

말하고 있는 문학작품을 낳기도 했습니다. 

  도가는 참된 길인 도는 인위를 초월하고 있는 곳에 있으며, 직관에 의하여 체득됨을 알렸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이 참된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 인위를 없애고 무위자연이 될 것을 권하였습니다. 우리가 없애야 할 인위 중에는 

유가의 도와 인, 예라고 주장합니다. 

 유가와 도가는 차이점이 있는데, 유가는 긍정적이며 현실적입니다. 또한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고 왕조들의 통치이념

으로서 사회에서 기본사상으로 자리 잡았고, 도가의 사상은 도피적이며 현실부정적이므로 하층민 사이에서 뿌리를 

내렸고, 이것이 도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이것들은 훗날 민간신앙과 철학적인 사고를 하는데에 원천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하고,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대변되기도 했습니다. 

 도가는 한나라 시대 이후에 구체적인 모습을 지닌 철학의 학파로서 독립성은 잃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상 들은 후에 중국의 불교에 수용되었고, 도교 교리에 형성을 도왔습니다. 이는 문예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했습니다. 

 3) 불교

 도가사상은 은둔의 지혜와 무욕에 대해 가르쳐 왔습니다. 불교가 중국 쪽으로 들어왔을 시기에 불교의 철학이 형성화 

되었고, 이 부분에서 도가사상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불교에 선종과 도가의 사상에는 사실 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많은 이들이 판단입니다. 또한 도가의 철학은 불교의 형태를 많이 받아들였고, 이 부분에서 도교가 

성립하게 됩니다. 도교는 민중의 종교인데 후세에 중국사회에 도교가 준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가의 사상은 감 필 체라고 칭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가치를 귀하게 보는 여성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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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누엘 칸트는 근대의 계몽주의를 높이 올려놓았고, 독일의 관념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프로이센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요.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칸트는 1724년 수공업자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1명 가운데 넷째 자녀였는데요.

에마누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칸트의 부모님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였고

이것은 칸트의 유년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칸트는 김나지움에 입학 후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을 알게 되고 그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후 물리학과 윤리학, 일반논리학등 여러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교수직을 

얻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18세기까지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영역에 속했고 

그 후 쾨니히베르크의 철학 교수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발표한 그의 논문이 칸트의 비판철학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후 칸트는 10년 정도 철학적인 침묵 기를 가지게 됩니다. 1780년대에 이르러 에세이와 저서를 발표하며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의 학문적인 성취도 높아져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총장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칸트는 규칙적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강의에 전념해 왔습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았고, 

커피와 담배를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1804년 칸트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 철학

칸트의 철학은 18세기에 아주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칸트 이전의 철학과 후의 철학이 차이점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칸트는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에 대한 쳬계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비판철학이라고 알려지기도 합니다. 

  1) 비판철학

 칸트의 철학은 비판철학이라고 불리는데요. 그의 저서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집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들은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순수이성비판 등 비판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칸트는 스스로 비판철학이라 칭하였습니다. 

  2) 인식론

 17세기~의 철학은 인식론에서 경험주의, 합리주의로 나뉘게 됩니다. 합리주의란 인간은 본래부터 선험적 이성이 

중시되었고, 경험주의란 인간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지식을 얻는다는 귀납법입니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시식이 확장

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경험주의 방식은 귀납적 방법을 강조하였고, 진리의 필연성이 나타나는데도

한계를 보였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한계를 지적해 왔고, 인식론은 인간이 감성으로 얻게 된 감각들을 지성으로 인식하였으며, 

초경험적인 것들도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감성자체는 물체지각의 능력이고, 감성과 지성을 통틀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3) 윤리학

 칸트는 윤리학의 연구에 매진했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을 추구하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옳은 일이라 

생각했는데요. 이것을 도덕법칙이라 불렀습니다. 칸트는 인간들이 감정에 휘둘리며 선의를 베푸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칸트가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인간 마음속에서 도덕심과 충동이 싸우는 상태라고 주장했

습니다. 또한 행의에 대한 결과보다는 동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명령이 아닌, 명령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어떠한 상황이든 따라야 한다는 의무로의 명령을 정언명령이라 하고 이를 주장했습니다.

 정언명령의 두 가지 명령 중 첫째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보편적인 입법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너 자신과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의 이결이 언제나 목적이 되도록 행하라 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에 대해 강조하였고, 그 자체로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 영향

 칸트가 서양의 철학사상에 준 영향은 매우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칸트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는 철학의 연구를 하였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철학의 전한 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모두 

유지되었습니다. 칸트의 생각들은 다른 학파들에게서도 드러납니다. 독일의 관념론, 실증주의, 언어철학, 해체주의 등 

칸트의 영향이 행동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사상들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글쓰기에서 영향을 받아 철학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독일 관념론입니다. 

  4. 비판

 칸트는 살아 있던 때부터 본인의 철학에 대해 많은 비판과 반발이 있었는데요. 칸트는 이성에 대해 그 능력과 

종교 모두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들이 이성을 신뢰하고 있던 그 당시의 시대상에 맞지 않아 철학자와 종교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받았습니다. 이게 칸트를 바라보던 제자인 헤르더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말에는 많은 사상이 넘쳐났고, 그의 농담과 재치는 충분한 장기였다. 또한 그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은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리고 어떤 편견과 음모, 명성을 위한 욕망 등에서도 그를 유혹하지는 못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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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 접했던 것이 철학이었습니다. 

그만큼 철학은 우리 시대에서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학문인데요. 

오늘은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 어원과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철학이란 

  1)철학의 본질

 철학은 어떤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판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과 세계가 삶을 살아가며 

알게 되는 원리와 본질, 세계관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되는데요. 가치와 이성, 존재, 인식, 윤리, 언어 등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실체에 대해 모두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프로타고라스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철학적 접근의 방법은 비판적인 

토론, 이성적인 주장, 체계적인 질문 등이 있습니다. 

  2)철학의 용어

 철학은 고대의 그리스어에 있는 필로소피아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 뜻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지혜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지식들이 아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통틀어

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 등을 말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철학이란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스에서는 학문에 대한 자체를 철학이라고 

칭하기도 했고, 전통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가치에 대해 본질적, 총체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동양이 서구화되면서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작하는 서양철학으로 나타내어지기도 했는데요. 

 사실 철학 자체는 동과 서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철학은 철학 자체에 기초하고있는 전제, 개념, 명료화

등으로 언어철학, 논리학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2. 철학의 대상

 철학은 많은 학문들과 함께 활용되고 있습니다. 윤리학, 정치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 논리학, 미학

등이 그 예입니다.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에 철학에 대한 연구대상은 바로 자연이었습니다. 

 자연을 그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고있는 대상이라고 판단한 것인데요.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인간의 

혼을 철학의 연구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또 윤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지요.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등장하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과 동시에 철학을 연구하여 

철학체계를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1) 중세철학

  중세시대의 철학 대상은 바로 신이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기에 종교의 

주관이 뚜렷해졌고 결국 신에 대한 고찰이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2) 근대철학

  근대에는 인간이 가진 지식에 근원에 대해 주로 연구하였고, 로크의 경험론,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경험론, 합리론을 종합하였고 이는 비판철학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3) 현대철학

  현대에는 언어철학,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등이 주된 쟁점이 되었습니다. 르네드소쉬르가 

 처음 언어에 대한 철학을 언급하였고, 그 뒤 루트비히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철학을 발전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등장한 구조즈의는 언어의 철학과 크게 연관 지어 발달하였고,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포스트구조주의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에 있던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3. 서양 철학의 역사

 그리스에서는 고대에 철학이 지식애나 학문의 일반 부분을 뜻했습니다. 그 종류로 가치의 철학, 도덕철학,

실증철학, 경제철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등이 나타났었는데요.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작이 밀레토스학파라고말하였으며, 신화에서 시작하여 학문으로 가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그리스에서의 철학은 모든 학문에 대한여왕이다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중세에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된

철학은 신학의시녀가 되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 철학은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고, 철학도 과학과 

연관 지어 발달했습니다. 과학뿐 아니라 종료와 예술, 일상생활에서도 철학은 다양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4. 철학문제의 특징

  철학이 다른 학문과 다르다고 구분 짓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철학과 다른 학문의 문제를 살피는 것입니다. 

18세기까지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과 독립적으로 나뉜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물리학이 현대의

자연과학과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철학에 대해 철학자 이마누엘칸트는 네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1)나는무엇을아는가?

  이것은 인식론의 주요한 문제입니다. 외부에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며 인간이 존재하는 실재가 과연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참된 인식에서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는지,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문제에 대해 

인간 대부분은 해결이 불가능한 것인지, 신이 존재하여 해결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했습니다.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윤리학에 대한 주요한 문제이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차이가 있는지,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3)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예술철학에서 생기는 주요한 문제들입니다. 예술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쾌락을 줄 수 있는지, 예술로 

보아지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철학에서 생기는 주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여 사회를 이루며, 인간이 살아가는 국가는

어떻게 생기며 또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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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것은 결국 인문학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오늘의 인문학이야기 인문학의 인식론 중 합리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합리론의 정의

 합리론이란 이성을 보는 눈이 지식이 가진 제일의 근원이라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합리론에서 보는 진리란 

감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역적 이론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합리론자들은 우리들이 가진 개념, 지식들이

감각이 가진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경험론자들은 감각적으로 가진 경험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지식들의 원천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합리론은 경험론과는 반대의 입장이며, 합리론자는 실제로 본질적 구조를 행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합리론자들에게 진리자체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가진 지성이 이런 진리들을 충분히 포착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합리론자들의 확신은 이성에 대해 매우 강하며, 경험적, 물리적 증거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합리론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권위에 대해 명쾌한 철학 그 자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에서의 합리론은 무종교, 세속주의, 공화주의에 집중한 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2. 합리론의 역사

 1) 고대의 합리론

   1-1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시대에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발달하지는 않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육체, 영혼을 구분하였고 영혼에 

 지성을 부여하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영혼을 감싸고 있는 육체가 하는 방해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그가 가진 영혼에는 우주만물이 가진 진리들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이 다른 육체로 옮겨가게 되면 희미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피타고라스의 학파에서 배출된 수학자들은 필롤라우스, 알크마이온 등이 

있습니다. 

   1-2 플라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등의 사상을 심화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데아의 개념도 만들었습니다.

  이데아는 만물이 가진 보편자를 아는 것이고, 사물의 특성을 만날 수 있는 길이며 단순한 감각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구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내용은 향연, 티마이오스, 파이돈 등 그의 저서에서도 확인됩니다. 

   1-3 키티온의 제논 

  키티온의 제논은 스토아주의의 이론가입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대우주, 소우주로 구분하고 인간들은 소우주를 인식함

으로서 진리가 가진 대우주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욕에 빠진 

감각, 참된 이성 두 가지로 나누었지만, 사실 이것들은 모두 우주를 통해 파생된 것이면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의  철학들은 합리론자인 바뤼흐스피노자를 통해 계승되기도 했습니다. 

  2) 중세의 합리론

 서구사회에서 4세기~5세기 부분에 기독교의 사고관이 크게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시기에 합리론적인 사고는 자취를 

감추었는데요. 하지만 중동지역에서는 신플라톤주의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과학자와 의학자가 배출되게

됩니다. 이런 현상 들은 합리론을 그대로 이어가게 해 주었는데요. 7세기부터는 아랍 쪽의 이슬람교가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에도 유지되게 됩니다. 이 현상을 두고 학자들은 이성과 지식을 강조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3) 근대의 합리론

  3-1 르네 데카르트 

  르네데카르트는 근대에 최초로 합리론자이며 근대철학이 배출한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서양철학이 말하는 대부분은 그의 저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영원하게 하는 진리를 뒷받침하는 지식은 오로지 이성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또 다른 지식인 물리학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움받은 세계를 향한 경험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꿈에서 나오는 경험들은 마치 진짜 같지만, 꿈을 통해 지식을 제공받을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요. 이러한 경험들은

환상이 낳은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의심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를 통해 지성과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은 지식으로 분류될 수 없다고 믿었고 이 부분에서 진리를 얻게 만드는 방법도 개발하게 됩니다. 

  3-2 바뤼흐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회의를 받아들이고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일원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해 주장한 근대 철학자로 바뤼흐 

스피노자가 있습니다. 바뤼흐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우주의 일부라고 하였는데 

이런 뜻은 신즉자연이라는 단어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가진 자연 본질과 소산적인 자연의

두 갈래로 나뉘고 이것들에 대해 사물의 이해도도 달라진다고 풀이하였습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상태에서 사물들이 가진 정합성은 따지지 않게 되고, 이것은 직관지로 다다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들은 데카르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주장한 심신이원론과 달리 스피노자는 심신평행롱을 

 주장하였습니다. 육체, 정신은 모두 하나이고 이것들은 우주를 통해 기원된 요소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인간들이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것, 또 다를 사고를 행하게 되는 것, 본인이 한 사고에 대해 본인이 다시 접하게 되는 것 등 

많은 상황들을 나누고 그에 따라 인간들이 어떤 원리를 행하게 되는지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키티온의 제놈

등의 스토아주의자들이 펼친 사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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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철학에서 경험론과 합리론이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이 가운데 경험론이란 어떤 것인지 

그 어원과 철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경험론의 어원 

 경험론에서는 두 가지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는 "겅험"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것은 라틴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 로마에서 활용으로부터 나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런의견들에 비추어 보면 설명과는 상반되고 실용적으로 경험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경험론과 철학원칙

 1) 영국의경험론

   영국의 경험론은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용어는 아닙니다. 17세기 초에 근대철학, 근대과학이 생기면서 그곳에서 

파생되었던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경험론을 처음 창시했던 프랜시스베이컨과 합리론을 처음 창시했던 르네데카르트

사이에서 생긴 차이점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세대인 토머스홉스, 바뤼흐스피노자는 

각자 경험론자, 합리론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조지버클리, 데이비드흄, 존로크 등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시대에 

경험론을 주로 했던 주창자였으며, 존로크가 경험론의 입장을 일반적으로 집대성하였고 이것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합리론의 응답

 17세기 초중기에 대륙의 합리론 응답으로, 존로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들은 오직 아포스테리오리하다며 

 경험으로부터 기반을 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로크의 견해는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이 감각적인 인상으로 파생되고 

그 경험이 쓰이며 백지라고 하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관념은 반영, 감각 등 두 가지의

원천이 있는데요. 두 가지의 구별을 복합적인 관념, 단순한 관념등에서 만들어집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가 없으며 종 된 성질, 주된 성질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주된 성질에 대해서는 객체에 

필요하며, 특별한 주된 성질 없이는 객체가 그것일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박은 원자론적 구조가 가진

배열을 통해 수박이 됩니다. 하지만 수박이 가진 구조가 달라진다면, 그것을 더 이상 수박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종 된 성질에 대해 주된 성질로부터 인식되는 정보입니다. 수박은 다양한 크기, 색깔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수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된 성질에 대해 객체가 무엇인지 결정하게 되고 종 된 성질은 

그것을 정의하게 됩니다. 

  3) 주관적 관념론

  아일랜드의 주교인 조지버클리는 로크가 펼친 견해가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로크의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사물이란 인식하게 된 결과로써 오직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버클리가 펼친 경험론은 그 이후 주관적인 관념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회의주의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인 데이비드흄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실체를 인정했던 로크의 비판에 대답하며 

경험론을 새롭게 이동시켰는데, 이것이 회의주의입니다. 흄은 모든 지식이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를 유지하였고, 이 견해가 일반 철학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흄은 로크의 논증에 대해 개연적인 것, 논증적인 것으로 구분하였는데요. 논증에는 증거와 검증된 것을, 개연적인 것들도

포함하여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흄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에 대해 관념의 관계이며,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두 가지의 범주로 해석하였습니다. 논리학적인 전제와 수학적인 전제는 첫 번째 예시로 들었으며, 세계를 향한 우연히 이루어진 관찰은 두 번째 예로 들었습니다. 두 번째 예시를 보통 해가 동쪽에서 뜬다 이 같은 논리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관념들은 인상으로부터 파생

된다고 합니다. 흄은 인상이란 우리가 보통 감각이라고 일컫는 것과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인상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념은 감각이 가진 희미한

복제로서, 모든 지식과 자연들이 가진 세계가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믿음까지도 이성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축적된 감각적 경험 덕분에 발전되었으며, 우리 몸에

축적된 습관이 내놓은 결과라는 주장도 함께 펼쳤습니다. 

 

 3. 경험론 이론

 경험론이란 철학에서 시작된 감각이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증거들, 그 증거들로부터 파생된 지식을 강조하게 되는 

이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라고 일컫는 인식의 원천을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추구하게 되는 것들과는 큰 대립이 

있습니다. 경험론에서는 인식론이라고 알려진 인간이 가진 지식, 그것과 관련된 학문가운데 가장 널리 퍼지게 된 관점

이기도 합니다. 경험론에서 관념이 생긴 형성과정, 생득관념, 관습 이런 것보다 증거와 경험, 감각이 가진 지각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맥락에서는 과학철학이 가진 경험론이 있습니다. 과학철학의 증거는 과학적인 지식과 실험에 토대를 두고 

관점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모든 가설과 이론들이 연역적 추론, 계시, 직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생기는 기존관찰에 반하며 검증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이런 내용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이 가진 힘이란 완전하게 방법론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으로서 현대사회와 근대사회를 통틀어 빠질 수 없이 

중요한 학문이며 앞으로도 큰 발전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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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알아가다 보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이 스콜라 철학가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방교회의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토마스학파에서는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지요. 현재에도 그의 이름을 모티브로 한 연구소나 

학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토마스아퀴나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1) 출생과 사망  

  토마스아퀴나스는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리 근교의 로카세카성에서 란돌포의 아홉 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토마스아퀴나스의 사망은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49살이 되던 해,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50세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소년기 

 토마스아퀴나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토마스를 성베네딕트 수도회의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미래에 수도원장으로서 자라기를 바랐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어 되고, 수도사 수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수도원을 나온 후 토마스는 나폴리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당시의 필수적인 학문이었던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 음악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들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수도사들을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원했던 부모의 기대를 버리게 된 것이지요. 

 귀족아들 출신으로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었던 토마스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3) 파리대학교의 교수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교의 신학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평화롭지 않았고, 

교수들의 대립도 극에 다 달던 시절이었지요. 토마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의 출신이었던 교수를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고

만에 하나 벌어질 폭력의 사태를 대비하여 프랑스왕이 보낸 군대가 배치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토마스는 파리대학교 사상 처음으로 교수직을 두 차례 역임하는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며 학생들도 올바르게 지도해야 했고, 성직자의 위치까지 있었으니 토마스가 가진 

압박감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4) 말년

  토마스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끝난 후 나폴리로 향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소논문을 작성하고 서간문에 대하여 주해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끊임없는 집필작업에 전념하였으나 1273년 니콜라스 축일 미사 중에 충격을 받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주변이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 미사 이후 어떠한 계기로 토마스는 저작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명상 중에도 의식을 잃은 모습이 종종 보였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 눕거나 일어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부터 토마스의 건강상태가 많이 악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5) 사후

  토마스는 1274년 3월 7일 여러 명의 수도사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영면하였습니다. 

 당시 파리대학의 총장과 교수들은 이런 비통함을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요. 이 편지의 내용은 토마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토마스가 자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인 파리에 토마스를 묻어달라는 부탁도 함께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포사누오바의 수도원에서는 위대한 성인이었던 토마스의 시신을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토마스 사후에 여러 가지 이론들이 단죄를 당하는 안 좋은 일들도 벌어지고

했습니다. 또한 토마스가 여러 가지 문제에서 어울릴 만큼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의 교황이었던 요한 22세는 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그때마다 기적들을 행한 것이었다

라는 말로 문제를 일출했다고 합니다. 

 

 2. 철학사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하였고 그것은 스콜라철학으로서 신앙과 이성 간의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존재론을 보면 신학의 특성을 이루고 있으며 실재적인 색채도 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과의 피조물 관계에 대해 존재의 유비를 사용하였고, 유비의 개념과 참여에 따라 차별을 가지고 존재를 파악하게 하는 

불가지론, 범신론의 위험도 피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구조의 규정원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가능태 개념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특히 아비체나에서 발견하게 된 본질과 존재에 대한 구별을 이용하였고, 독자적인 원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존재와 본질이 함께 일치하는 신존재가 필연성, 창조라는 관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신이 하는 존재의 증명에는 본체론적인 증명을 피했고, 경험을 토대로 주어진 사실부터 출발하여 첫 번째 원인인

다섯 가지의 길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악이 가진 문제는 선의결여의 관점으로부터 해석되었는데요. 

 인격의 단일성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그는 영혼이 유일형상성에 바탕과 중점을 두고 있는 인간학에 대해 전재하였습니다. 

이성적인 동물으로서 합성체인 인간에게는 이상작용, 의지작용이 있었으며 영혼은 인식하고 있는 작용의 원리이며

식물적, 동물적의 원리도 함께 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도덕록에서 모두가 가진 도덕은 신을 향한 이성, 피조물의 운동이며 여기여 대응하는 수단으로 윤리적인 행위는 

심리학으로 분석한다고 밝혔습니다. 도덕률이 영원법에 대한 반영이라고 보았고, 신이 향한 목적을 가진 존재론은 

그 안에서 파악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것들은 이성의 소리가 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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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는 다양한 하위분류가 존재하는데요. 

그중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끊임없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미술사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미술사학의 역사 

 미술은 인문학에서 뛰어나게 가지고 있는 전통, 예를 들어  고대의 이집트와 그리스, 중국과 로마, 메소포타미아 

메소아메리카, 인도 등과 같은 고대의 문명들 중 하나의 문학인 미술에서부터 기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신체적인 형태, 근육과 자세에 대한 숭배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기술들을 개발하고 또 고안해 왔습니다. 고대의 고마 미술은 인간이 이상화된 신들을 

묘사하였는데, 그 특유의 구별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제우스의 천둥번개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배하였던 중세시대의 고딕미술과 비잔틴 미술은 실체적인 가치로서의 귀환을 의미하였고, 이러한 것들의

전환은 인간이 신체의 풍경에 대해 삼차원적인 실제성을 보여주게되는 예술의 양식으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동양의 미술은 일반적으로는 서양의 중세에 미술과 유사하게 작업되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무늬를 가지고 부분적인

색채와 농도를 가졌는데요. 이는 빛, 그림자, 반사 등에 일어나는 색채의 변주와는 다르게 붉은색 관복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붉은색을 사용하고, 물체가 가지는 담백한 색채를 의미하는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티베트, 인도,

일본에서 보여주는 미술에서 뚜렷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미술은 도학상을 금지하였고, 기하학을 통하며 종교적으로 관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물리적, 합리적인 확실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학을 통한 새로운 발견에 

의한 것 이외에 미증유의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산산이 깨진 19세기의 계몽주의에 따라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증가하였던 세계적 교류들은 서양의 미술속에 또 다른 문화들에게도 동등하게 영향력을 주기도 했습니다.

 

 2. 미술사학 매체의 종류

  1) 그림

  여러가지 도구들과 기술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도구를 가지고 캔버스에 압력을 가하고 

표시하며 도구를 움직이는것들을 모두 포함하는데요. 여기에 쓰이는 도구들은 연필과 펜, 잉크, 크레용, 파스텔, 숯, 

색연필, 붓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디지털 도구들도 사용됩니다. 

 그림에서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는데, 선 그리기와 교차해칭, 점화, 뒤섞기 등으로 분류되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이

있는 사람을 화가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2)회화

 회화란 용기 안에 담긴 안료와 또 다른 접착물을 종이나 캔버스, 벽등과 같은 면에 바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예술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표현하는 행위자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구도와 그림, 미적인 부분등을 고려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화는 영적인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데요. 이러한 종류는 성당에 있는 

신화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 색

 음악에서는 듣고 말하는 소리가 필수입니다. 그림체에서는 색이 필수적입니다. 색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심리적인 영향들이 색 아래에 놓아져 있기 때문에 , 문화의 관점에서 색에 따라 

파악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검은색이 애도의 뜻을 지닌다고 알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흰색이 애도의 색상일 수도 있습니다. 칸딘스키, 아이작뉴턴, 괴테를 포함하여 많은 화가, 작가, 이론가,

과학자들은 모두 각자 스스로의 색 이론을 써왔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색상과 같은 것에 대한 일반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빨강의 

스펙트럼은 폭넓게 펼쳐져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에서의 다조, 내림 다죠와 같이 모든 음들은 기준이 있습니다. 

 또한 색은 팬톤시스템의 목적으로 인쇄와 디자인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인한 공식적인

정식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화가들은 콜라주와 같은 부분을 예를 들어, 회화에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을 크게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큐비즘과 함께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엄격하게 그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부의 화가들은 회화적인

질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밀짚과 시멘트, 모래 등과 같이 각기 다른 재료들도 넣어왔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화가 들고 

장 두부펫, 안셀름키퍼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근대와 현대의 미술은 역사적인 기교를 넣은 것에 가치를 두었던

개념에 대하여 옹호하는 부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에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시각에서는 진정한 미술들의 형식은 그 안에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술이란 사라질 수 없는 인문학의 한 종류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회화나 색표현, 그림체 들이 

달라지고 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고대의 미술 표현 화가들이

현시대에 더욱 각광받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술을 표현함에 있어 많은 분들이 각자의 시각을 가진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 낼 수는 없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섬세한 기술로 표현하는 기법 또한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는 있지만,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인문학 가운데 미술사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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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연구는 매우 광범위한 교육기준이며,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음악, 산술, 천문, 기하와 함께 수사, 논리, 문법 등 일곱 가지의 자유로운 인문학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기술들은 중세시절 교육에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인문학은 전통분야로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인문학의 하위 분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고전학

 서양의 전통적인 학문 가운데 고대의 문화와 로마문화로 불리는 고전학이 있습니다. 

고전의 연구는 인문과학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동안에는 중요성이 감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같은 문학가운데 고전적인 관념들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고전은 세계의 중요한 문명 가운데에서 집필되어진 기본적인 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역사학 

 역사란 체계적인 과거라고 볼수있는 큰 정보의 하나입니다. 학문분야의 이름가운데 역사학은 사회와 인간, 

제도와 흐름에 따라 차츰 변해왔습니다.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은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사고 기술을 모두 알고 있다고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인문학에서는 한가지 분야로 간주되어 왔는데요. 현대의 역사학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연대디가 초점적으로 될때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3. 언어

 언어는 인간이 발생시킨 최고의 정보체계이며, 의사소통수단이 되었습니다. 고전과 현대의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문학의 뼈대를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로 언어학과 사회과학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과학으로 언어학의 역사는 아주 길지는 않습니다. 19세기에 언어의 역사학이 중심을 이루었고,

20세기 이후에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이해하는 관점도 생겨났습니다. 이후 언어의 변화들은 인문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4. 음악사학

 음악은 악보라는 종이로 기록된 시간예술이며 소리예술입니다. 인간은 예술과 이성, 감성이 조화되는 산물이므로 

음악과 역사에 대한 탐구를 필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음악사학은 고대그리스시절부터, 동양에서는 

중국, 인도 등에서 연구되어 왔고, 가장 오랜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사학은 그리스 시대에 4과에 포함

되어있었으며,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근대과학과 인문학으로도 발전되었습니다. 

 음악사학은 동양음악사학, 서양음악사학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음악과 경제, 정치, 사회 등의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음악연주는 실기영영이기에 학문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를 예술로 재현하는 부분은 

학문의 영역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5. 철학 

 인문학의 기본뼈대라 볼 수 있는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은 고대그리스 시절부터 지혜로운 사랑을 의미했고 

전통적으로 세계와 인간, 현상가치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철학은 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제나 개넘, 관계에

대한 언어철학, 논리학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고대의 필로소피아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 있는 지혜라는 단어는 인간과 세계를 가리키는 지식을 말합니다. 가치관과 인생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철학은 어떤 문화에서도 깊이 존재되어 왔습니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도 철학에 대한 지혜는 발견

되어왔습니다. 서구화가 되면서 철학이란 서양철학의 일반을 지칭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학 자체로서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마누엘칸트는 고대의 그리스 철학이 윤리학과 자연학, 논리학의 세 가지 분류로 나뉜다고

설명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물리학과 심리학, 인공지능, 언어학등과 같이 개별적인 학문분야로도 나뉘게 되었습니다. 

 

6. 종교학

 많은 역사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에 대해 신석기 시절부터 시작하여 탐색합니다. 이 시절에 종교적으로 가졌던 믿음은 

모계신, 하늘신에 대하여 숭배하고 해와 달도 신으로서의 숭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동양,서양 양쪽으로부터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나타났습니다. 시간은 점차 흘렀고, 중요한 신앙들 

가운데 일부인 불교와 인도 힌두교,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와 같이 곳곳에 새로운 종교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동양 쪽에서는 세개의 유파가 중국인들의 지배적인 사상이었고,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도가와 유가, 법가가 그 세 가지 사상입니다. 유교의 전통은 경지에 다 달았고 법의 강제성이 아닌 전통을 지키는 모범과

권위를 정치도덕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서양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대표되고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중동과 유럽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하나로 공통된 셈족의 전통이 만들어낸 종교들입니다. 특히 꾸란에서는 예언자이며 창세기 20장

7절에서 예언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히브리성경에서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장로의 하나로 아브라함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조사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규모의 종교로 만들어진 커다란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일반적인 종교와 세계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의 절반에 해당하게 되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도 포관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서 종교학은 어느새 큰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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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 하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철학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분야인데요. 오늘은 스콜라철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스콜라주의

 스콜라는 여유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변형할 때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낱말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은 학파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9세기~15세기 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신학을 통한 

철학적인 사상을 일컫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철학을 모두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콜라철학은 기독교가 가진 신학의 바탕 안에 있는데, 그렇기에 일반적인 철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진리탐구나 인식 등의 문제를 신앙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에서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부분을 문제로 다루었는데, 이 부분에서 스콜라의 철학인들은 

이 부분을 단순히 연구하지 않았고,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부분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논리학을 발전하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 스콜라주의의 역사 

  1) 게르만민족 이후 

   게르만 민족이 이동한 이후 유럽은 문화가 부진하게 되는 시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때의 문화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어느 정도는 유지되게 되었는데요, 이동안 프랑크왕국이 발전하였으며 

  카를대제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유럽을 거의 통일하게 됩니다. 카를대제를 통해 시작하게 된 학예는 

 중세 유럽을 최초로 문화개화를 하게 된 카롤링거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카를대제가 가진 본래의 의도는 성직자들이 교양을 높여 올바른 기독교으 신앙을 잔파 하려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을 위하여 처음에 라틴어 습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중세 초기에 섬나라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가 대륙에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2) 카롤링거 르네상스 후기 

  이 시기에는 사상가로서 고트샤르크와 스코투스에리우게나를 들 수 있습니다. 

 고트샤르크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이단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논설을 둘러싸고 왕국에서 

 신학의 논쟁이 활발해졌고, 신의예정이나 자유의지 등의 문제들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신학도의 대체로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스코투스에리우게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구분론이라는 

철학서적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는 다시 침체하게 됩니다. 

  3) 베렌가리우스시개

  베렌가리우스는 투르출신입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고 성스러운 빵, 포도주 등은 예수가 가진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이성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이성을 악용하는 것은 반대하였습니다. 최초에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는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입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성서의 권위에 의하지 아니하며 이성에만 의거해 

논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을 내세우게 됩니다. 

 안셀무스의 선구적 활동을 통해 스콜라척학은 12세기에 촉진되었고, 13세기에는 높은 발전에 이르게 

 됩니다. 중세문화 최성기에 원숙 기를 이루었습니다. 

 

  3. 프란체스코회 학파 

 프란체스코회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유대철학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향도 있었는데 종자적인 원리나 조명설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지켰고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습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는 신학대전을 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경험적인 철학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스콜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대결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세계에서 의의가 매우 크게 되었습니다. 12세기 중기에 들어서며 그때 발견된 논리학에 이어서 자연학, 

형이상학등이 들어와 파리에서 읽히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자들은 교의와

모순되는 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저작의 주해 부분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령을 

받았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교수금지령을 받았지만,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내용연구가 필요했고 

그로 인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시대적 사정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반의 서양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아라비아 세력이 침략하는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사상적인 무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신과 영혼이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 속에는 심리학과 신학이 있었지만 자연학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결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철학은 신과 영혼에 국한되지 않았고, 만유의 세계를 포괄하고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등장한 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였고, 토마스의 철학 속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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