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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알아가다 보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이 스콜라 철학가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방교회의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토마스학파에서는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지요. 현재에도 그의 이름을 모티브로 한 연구소나 

학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토마스아퀴나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1) 출생과 사망  

  토마스아퀴나스는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리 근교의 로카세카성에서 란돌포의 아홉 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토마스아퀴나스의 사망은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49살이 되던 해,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50세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소년기 

 토마스아퀴나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토마스를 성베네딕트 수도회의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미래에 수도원장으로서 자라기를 바랐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어 되고, 수도사 수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수도원을 나온 후 토마스는 나폴리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당시의 필수적인 학문이었던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 음악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들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수도사들을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원했던 부모의 기대를 버리게 된 것이지요. 

 귀족아들 출신으로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었던 토마스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3) 파리대학교의 교수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교의 신학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평화롭지 않았고, 

교수들의 대립도 극에 다 달던 시절이었지요. 토마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의 출신이었던 교수를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고

만에 하나 벌어질 폭력의 사태를 대비하여 프랑스왕이 보낸 군대가 배치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토마스는 파리대학교 사상 처음으로 교수직을 두 차례 역임하는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며 학생들도 올바르게 지도해야 했고, 성직자의 위치까지 있었으니 토마스가 가진 

압박감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4) 말년

  토마스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끝난 후 나폴리로 향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소논문을 작성하고 서간문에 대하여 주해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끊임없는 집필작업에 전념하였으나 1273년 니콜라스 축일 미사 중에 충격을 받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주변이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 미사 이후 어떠한 계기로 토마스는 저작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명상 중에도 의식을 잃은 모습이 종종 보였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 눕거나 일어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부터 토마스의 건강상태가 많이 악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5) 사후

  토마스는 1274년 3월 7일 여러 명의 수도사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영면하였습니다. 

 당시 파리대학의 총장과 교수들은 이런 비통함을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요. 이 편지의 내용은 토마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토마스가 자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인 파리에 토마스를 묻어달라는 부탁도 함께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포사누오바의 수도원에서는 위대한 성인이었던 토마스의 시신을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토마스 사후에 여러 가지 이론들이 단죄를 당하는 안 좋은 일들도 벌어지고

했습니다. 또한 토마스가 여러 가지 문제에서 어울릴 만큼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의 교황이었던 요한 22세는 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그때마다 기적들을 행한 것이었다

라는 말로 문제를 일출했다고 합니다. 

 

 2. 철학사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하였고 그것은 스콜라철학으로서 신앙과 이성 간의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존재론을 보면 신학의 특성을 이루고 있으며 실재적인 색채도 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과의 피조물 관계에 대해 존재의 유비를 사용하였고, 유비의 개념과 참여에 따라 차별을 가지고 존재를 파악하게 하는 

불가지론, 범신론의 위험도 피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구조의 규정원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가능태 개념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특히 아비체나에서 발견하게 된 본질과 존재에 대한 구별을 이용하였고, 독자적인 원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존재와 본질이 함께 일치하는 신존재가 필연성, 창조라는 관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신이 하는 존재의 증명에는 본체론적인 증명을 피했고, 경험을 토대로 주어진 사실부터 출발하여 첫 번째 원인인

다섯 가지의 길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악이 가진 문제는 선의결여의 관점으로부터 해석되었는데요. 

 인격의 단일성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그는 영혼이 유일형상성에 바탕과 중점을 두고 있는 인간학에 대해 전재하였습니다. 

이성적인 동물으로서 합성체인 인간에게는 이상작용, 의지작용이 있었으며 영혼은 인식하고 있는 작용의 원리이며

식물적, 동물적의 원리도 함께 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도덕록에서 모두가 가진 도덕은 신을 향한 이성, 피조물의 운동이며 여기여 대응하는 수단으로 윤리적인 행위는 

심리학으로 분석한다고 밝혔습니다. 도덕률이 영원법에 대한 반영이라고 보았고, 신이 향한 목적을 가진 존재론은 

그 안에서 파악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것들은 이성의 소리가 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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