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 하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철학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분야인데요. 오늘은 스콜라철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스콜라주의
스콜라는 여유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변형할 때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낱말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은 학파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9세기~15세기 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신학을 통한
철학적인 사상을 일컫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철학을 모두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콜라철학은 기독교가 가진 신학의 바탕 안에 있는데, 그렇기에 일반적인 철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진리탐구나 인식 등의 문제를 신앙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에서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부분을 문제로 다루었는데, 이 부분에서 스콜라의 철학인들은
이 부분을 단순히 연구하지 않았고,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부분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논리학을 발전하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 스콜라주의의 역사
1) 게르만민족 이후
게르만 민족이 이동한 이후 유럽은 문화가 부진하게 되는 시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때의 문화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어느 정도는 유지되게 되었는데요, 이동안 프랑크왕국이 발전하였으며
카를대제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유럽을 거의 통일하게 됩니다. 카를대제를 통해 시작하게 된 학예는
중세 유럽을 최초로 문화개화를 하게 된 카롤링거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카를대제가 가진 본래의 의도는 성직자들이 교양을 높여 올바른 기독교으 신앙을 잔파 하려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을 위하여 처음에 라틴어 습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중세 초기에 섬나라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가 대륙에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2) 카롤링거 르네상스 후기
이 시기에는 사상가로서 고트샤르크와 스코투스에리우게나를 들 수 있습니다.
고트샤르크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이단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논설을 둘러싸고 왕국에서
신학의 논쟁이 활발해졌고, 신의예정이나 자유의지 등의 문제들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신학도의 대체로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스코투스에리우게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구분론이라는
철학서적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는 다시 침체하게 됩니다.
3) 베렌가리우스시개
베렌가리우스는 투르출신입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고 성스러운 빵, 포도주 등은 예수가 가진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이성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이성을 악용하는 것은 반대하였습니다. 최초에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는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입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성서의 권위에 의하지 아니하며 이성에만 의거해
논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을 내세우게 됩니다.
안셀무스의 선구적 활동을 통해 스콜라척학은 12세기에 촉진되었고, 13세기에는 높은 발전에 이르게
됩니다. 중세문화 최성기에 원숙 기를 이루었습니다.
3. 프란체스코회 학파
프란체스코회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유대철학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향도 있었는데 종자적인 원리나 조명설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지켰고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습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는 신학대전을 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경험적인 철학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스콜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대결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세계에서 의의가 매우 크게 되었습니다. 12세기 중기에 들어서며 그때 발견된 논리학에 이어서 자연학,
형이상학등이 들어와 파리에서 읽히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자들은 교의와
모순되는 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저작의 주해 부분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령을
받았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교수금지령을 받았지만,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내용연구가 필요했고
그로 인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시대적 사정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반의 서양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아라비아 세력이 침략하는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사상적인 무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신과 영혼이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 속에는 심리학과 신학이 있었지만 자연학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결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철학은 신과 영혼에 국한되지 않았고, 만유의 세계를 포괄하고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등장한 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였고, 토마스의 철학 속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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