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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수양론에 대해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수양론이란 무엇인가?? 논어에서 옹야편을 

보다 보면 배움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부를 많이 하게 되면 노여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실수도 두 번 이상 반복하지는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옹야 편에서 뿐 아니라 유가를 알게 되는 배움에서 볼 때 

공부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 공부를 많이 하게 된 사람이 결과적으로 갖추게 된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보통의 사람들도 노여움을 감추고 실수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공부를 많이 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인데요. 공부와 수양이 동일시된다라는 태도라고 보입니다. 

  1. 수양론의 극치

 수양론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치국평천하를 하고 싶다면 먼저 수신제가해야 하고 

수직적으로 논리를 보이는 것이 큰 문제인데요. 이런 방식이 보여주는 수양론은 통치적 논리가 우선시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이 수양이 부족하거나,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면 사회적 업무도 엉망이 되고 

나랏일도 잘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통치가 기반이 되는 수직방식의 수양론은 자기가 하는 권력에 대하여 

비판을 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최면제에 구실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과거에 독재정권에서 대항하는 

세력을 차단하려는 전술로 많이 사용했었는데요, 현재까지도 정치권에서는 많이 행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이 수직적인 논리가 아니라 수신과 젠가를 함께 하고, 또 치국과 평천하 

하게 되는 수평적인 논리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보다는 상대적이지만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수평적인 이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2. 격물치지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통치와 관련된 공부라고 한다면 격물치지성의정 심은 수양과 관련된 공부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두 가지 부류는 하나의 공부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격물치지가 말하는 대상이 과거에는 사회, 인간이었다고 한다면 현재는 사회와 인간은 당연하고

자연과 형식논리, 심리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학문의 범위는 결국에는 동양고전에는 따로 없었던 심리과학, 자연과학, 수학

으로 크게 학문이 나누어지면서 학문은 깊어지고 세분화되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의 분야가 확장되면서 학문의 수양론은 폐기되게 됩니다. 이때 학문이 권력화되고
공부를 왜 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가치의 중립성이라는 기준들이 생겨나면서 
새롭게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3. 동양철학의 출발


 동양철학이 자리잡게 된 즈음, 그 출발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실천의 과제로 어떤 때에는 
실용주의, 어떤 때는 정권이 유지되는 이데올로기. 어떤 때에는 물가와 유가의 논쟁 같은 사랑이 하는
차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 것은 그때 당시의 역사적인 소명의 의식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화의 시점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보다는 
소극적으로 나타났으며, 자기 보호의 학문이론으로 진전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실천에 대하여 메타실천의 이론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80년대부터는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현실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였고 이때 동양의 철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군자가 말하는 논리를 무조건 따르자는 의견부터, 우리가 모두 실천하는 철학으로 나뉘어서 확산되었습니다. 
동양의 철학은 군자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따르는데 사실 군자들의 수양법은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멀고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길을 끝까지 따른다고 하여도 혼자 수양을 완성하고 치국평천하를 
이루기는 좀 벅차며 이런 것이 군자의 논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동양의 철학들은 현시대의
실천론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며 실천에 대한 좋은 글들이 가끔은 또 하나의 이론이라는 의견들도 
보이고 있습니다. 


 4. 수양을 위한 실천


 수양의 위해서 결국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요즈음의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지는 않습니다. 
 철학의 의미, 구실을 질문하는 것이 현대의 산업사회에 들어와 점점 더 앙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첨단과학이 발전하고 자본주의시대가 되면서 우리 삶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매일매일 다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철학만을 따라가는 것이 가끔은 어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꽤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은 사실 이데올로기 시대보다도 더 할 일이 많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철학은 그저 박제되어 있는 철학일 뿐입니다. 
 철학에 대해 학문의 밑받침, 도의 기반으로 여기고 본인의 속마음에 대해 단장하며 행실도 살피는 동시에 마음을 
반성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아는 것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바탕으로 깊이 철학을 연구하고 내가 알고 있다
하여 자만하지 않고 학문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옳은 일들은 반드시 실천하려 노력하고 어려울 때는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철학에 대한 공부는 진정한 실천이며 그 길로 가기 위하여 치지 와 존양,
성찰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학은 현시대에도 큰 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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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누엘 칸트는 근대의 계몽주의를 높이 올려놓았고, 독일의 관념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프로이센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있는데요.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칸트는 1724년 수공업자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1명 가운데 넷째 자녀였는데요.

에마누엘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칸트의 부모님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였고

이것은 칸트의 유년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칸트는 김나지움에 입학 후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을 알게 되고 그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후 물리학과 윤리학, 일반논리학등 여러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교수직을 

얻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18세기까지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의 영역에 속했고 

그 후 쾨니히베르크의 철학 교수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발표한 그의 논문이 칸트의 비판철학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후 칸트는 10년 정도 철학적인 침묵 기를 가지게 됩니다. 1780년대에 이르러 에세이와 저서를 발표하며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의 학문적인 성취도 높아져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총장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칸트는 규칙적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강의에 전념해 왔습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았고, 

커피와 담배를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1804년 칸트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 철학

칸트의 철학은 18세기에 아주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칸트 이전의 철학과 후의 철학이 차이점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칸트는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에 대한 쳬계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비판철학이라고 알려지기도 합니다. 

  1) 비판철학

 칸트의 철학은 비판철학이라고 불리는데요. 그의 저서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집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들은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순수이성비판 등 비판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칸트는 스스로 비판철학이라 칭하였습니다. 

  2) 인식론

 17세기~의 철학은 인식론에서 경험주의, 합리주의로 나뉘게 됩니다. 합리주의란 인간은 본래부터 선험적 이성이 

중시되었고, 경험주의란 인간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지식을 얻는다는 귀납법입니다. 합리주의의 방식은 시식이 확장

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경험주의 방식은 귀납적 방법을 강조하였고, 진리의 필연성이 나타나는데도

한계를 보였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한계를 지적해 왔고, 인식론은 인간이 감성으로 얻게 된 감각들을 지성으로 인식하였으며, 

초경험적인 것들도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감성자체는 물체지각의 능력이고, 감성과 지성을 통틀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3) 윤리학

 칸트는 윤리학의 연구에 매진했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차이가 나는 도덕이 아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을 추구하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옳은 일이라 

생각했는데요. 이것을 도덕법칙이라 불렀습니다. 칸트는 인간들이 감정에 휘둘리며 선의를 베푸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칸트가 옳고 그른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인간 마음속에서 도덕심과 충동이 싸우는 상태라고 주장했

습니다. 또한 행의에 대한 결과보다는 동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명령이 아닌, 명령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어떠한 상황이든 따라야 한다는 의무로의 명령을 정언명령이라 하고 이를 주장했습니다.

 정언명령의 두 가지 명령 중 첫째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보편적인 입법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너 자신과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의 이결이 언제나 목적이 되도록 행하라 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에 대해 강조하였고, 그 자체로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 영향

 칸트가 서양의 철학사상에 준 영향은 매우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칸트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는 철학의 연구를 하였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철학의 전한 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모두 

유지되었습니다. 칸트의 생각들은 다른 학파들에게서도 드러납니다. 독일의 관념론, 실증주의, 언어철학, 해체주의 등 

칸트의 영향이 행동과학과 사회과학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사상들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글쓰기에서 영향을 받아 철학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독일 관념론입니다. 

  4. 비판

 칸트는 살아 있던 때부터 본인의 철학에 대해 많은 비판과 반발이 있었는데요. 칸트는 이성에 대해 그 능력과 

종교 모두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들이 이성을 신뢰하고 있던 그 당시의 시대상에 맞지 않아 철학자와 종교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받았습니다. 이게 칸트를 바라보던 제자인 헤르더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말에는 많은 사상이 넘쳐났고, 그의 농담과 재치는 충분한 장기였다. 또한 그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은 무관심하게

대했다. 그리고 어떤 편견과 음모, 명성을 위한 욕망 등에서도 그를 유혹하지는 못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부드러움을 유지하고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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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 접했던 것이 철학이었습니다. 

그만큼 철학은 우리 시대에서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학문인데요. 

오늘은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 어원과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철학이란 

  1)철학의 본질

 철학은 어떤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판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과 세계가 삶을 살아가며 

알게 되는 원리와 본질, 세계관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되는데요. 가치와 이성, 존재, 인식, 윤리, 언어 등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실체에 대해 모두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프로타고라스가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철학적 접근의 방법은 비판적인 

토론, 이성적인 주장, 체계적인 질문 등이 있습니다. 

  2)철학의 용어

 철학은 고대의 그리스어에 있는 필로소피아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 뜻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지혜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지식들이 아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통틀어

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 등을 말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철학이란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스에서는 학문에 대한 자체를 철학이라고 

칭하기도 했고, 전통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가치에 대해 본질적, 총체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동양이 서구화되면서 철학은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작하는 서양철학으로 나타내어지기도 했는데요. 

 사실 철학 자체는 동과 서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철학은 철학 자체에 기초하고있는 전제, 개념, 명료화

등으로 언어철학, 논리학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2. 철학의 대상

 철학은 많은 학문들과 함께 활용되고 있습니다. 윤리학, 정치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 논리학, 미학

등이 그 예입니다.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에 철학에 대한 연구대상은 바로 자연이었습니다. 

 자연을 그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고있는 대상이라고 판단한 것인데요.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인간의 

혼을 철학의 연구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또 윤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지요.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등장하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과 동시에 철학을 연구하여 

철학체계를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1) 중세철학

  중세시대의 철학 대상은 바로 신이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기에 종교의 

주관이 뚜렷해졌고 결국 신에 대한 고찰이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2) 근대철학

  근대에는 인간이 가진 지식에 근원에 대해 주로 연구하였고, 로크의 경험론,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경험론, 합리론을 종합하였고 이는 비판철학의 완성이 되었습니다. 

 3) 현대철학

  현대에는 언어철학,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등이 주된 쟁점이 되었습니다. 르네드소쉬르가 

 처음 언어에 대한 철학을 언급하였고, 그 뒤 루트비히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철학을 발전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등장한 구조즈의는 언어의 철학과 크게 연관 지어 발달하였고, 구조주의에 대항하는 포스트구조주의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에 있던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3. 서양 철학의 역사

 그리스에서는 고대에 철학이 지식애나 학문의 일반 부분을 뜻했습니다. 그 종류로 가치의 철학, 도덕철학,

실증철학, 경제철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등이 나타났었는데요. 역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작이 밀레토스학파라고말하였으며, 신화에서 시작하여 학문으로 가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그리스에서의 철학은 모든 학문에 대한여왕이다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중세에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된

철학은 신학의시녀가 되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 철학은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고, 철학도 과학과 

연관 지어 발달했습니다. 과학뿐 아니라 종료와 예술, 일상생활에서도 철학은 다양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4. 철학문제의 특징

  철학이 다른 학문과 다르다고 구분 짓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철학과 다른 학문의 문제를 살피는 것입니다. 

18세기까지 물리학과 수학은 철학과 독립적으로 나뉜 학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물리학이 현대의

자연과학과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철학에 대해 철학자 이마누엘칸트는 네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1)나는무엇을아는가?

  이것은 인식론의 주요한 문제입니다. 외부에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며 인간이 존재하는 실재가 과연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참된 인식에서 어떻게 지식을 얻게 되는지,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문제에 대해 

인간 대부분은 해결이 불가능한 것인지, 신이 존재하여 해결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했습니다.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윤리학에 대한 주요한 문제이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차이가 있는지,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3)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예술철학에서 생기는 주요한 문제들입니다. 예술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쾌락을 줄 수 있는지, 예술로 

보아지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철학에서 생기는 주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여 사회를 이루며, 인간이 살아가는 국가는

어떻게 생기며 또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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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것은 결국 인문학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오늘의 인문학이야기 인문학의 인식론 중 합리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합리론의 정의

 합리론이란 이성을 보는 눈이 지식이 가진 제일의 근원이라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합리론에서 보는 진리란 

감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역적 이론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합리론자들은 우리들이 가진 개념, 지식들이

감각이 가진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경험론자들은 감각적으로 가진 경험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지식들의 원천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합리론은 경험론과는 반대의 입장이며, 합리론자는 실제로 본질적 구조를 행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합리론자들에게 진리자체가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가진 지성이 이런 진리들을 충분히 포착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합리론자들의 확신은 이성에 대해 매우 강하며, 경험적, 물리적 증거들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합리론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권위에 대해 명쾌한 철학 그 자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에서의 합리론은 무종교, 세속주의, 공화주의에 집중한 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2. 합리론의 역사

 1) 고대의 합리론

   1-1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의 시대에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발달하지는 않았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육체, 영혼을 구분하였고 영혼에 

 지성을 부여하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오류에 대해 영혼을 감싸고 있는 육체가 하는 방해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그가 가진 영혼에는 우주만물이 가진 진리들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이 다른 육체로 옮겨가게 되면 희미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피타고라스의 학파에서 배출된 수학자들은 필롤라우스, 알크마이온 등이 

있습니다. 

   1-2 플라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등의 사상을 심화하고 발전시켰으며 이데아의 개념도 만들었습니다.

  이데아는 만물이 가진 보편자를 아는 것이고, 사물의 특성을 만날 수 있는 길이며 단순한 감각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구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내용은 향연, 티마이오스, 파이돈 등 그의 저서에서도 확인됩니다. 

   1-3 키티온의 제논 

  키티온의 제논은 스토아주의의 이론가입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대우주, 소우주로 구분하고 인간들은 소우주를 인식함

으로서 진리가 가진 대우주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정욕에 빠진 

감각, 참된 이성 두 가지로 나누었지만, 사실 이것들은 모두 우주를 통해 파생된 것이면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의  철학들은 합리론자인 바뤼흐스피노자를 통해 계승되기도 했습니다. 

  2) 중세의 합리론

 서구사회에서 4세기~5세기 부분에 기독교의 사고관이 크게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시기에 합리론적인 사고는 자취를 

감추었는데요. 하지만 중동지역에서는 신플라톤주의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과학자와 의학자가 배출되게

됩니다. 이런 현상 들은 합리론을 그대로 이어가게 해 주었는데요. 7세기부터는 아랍 쪽의 이슬람교가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에도 유지되게 됩니다. 이 현상을 두고 학자들은 이성과 지식을 강조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3) 근대의 합리론

  3-1 르네 데카르트 

  르네데카르트는 근대에 최초로 합리론자이며 근대철학이 배출한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서양철학이 말하는 대부분은 그의 저술과 관련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영원하게 하는 진리를 뒷받침하는 지식은 오로지 이성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또 다른 지식인 물리학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움받은 세계를 향한 경험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꿈에서 나오는 경험들은 마치 진짜 같지만, 꿈을 통해 지식을 제공받을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요. 이러한 경험들은

환상이 낳은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의심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를 통해 지성과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은 지식으로 분류될 수 없다고 믿었고 이 부분에서 진리를 얻게 만드는 방법도 개발하게 됩니다. 

  3-2 바뤼흐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회의를 받아들이고 이원론을 비판하면서, 일원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해 주장한 근대 철학자로 바뤼흐 

스피노자가 있습니다. 바뤼흐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우주의 일부라고 하였는데 

이런 뜻은 신즉자연이라는 단어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가진 자연 본질과 소산적인 자연의

두 갈래로 나뉘고 이것들에 대해 사물의 이해도도 달라진다고 풀이하였습니다.

이 상태에 도달한 상태에서 사물들이 가진 정합성은 따지지 않게 되고, 이것은 직관지로 다다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들은 데카르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주장한 심신이원론과 달리 스피노자는 심신평행롱을 

 주장하였습니다. 육체, 정신은 모두 하나이고 이것들은 우주를 통해 기원된 요소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저서를 보면 

인간들이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것, 또 다를 사고를 행하게 되는 것, 본인이 한 사고에 대해 본인이 다시 접하게 되는 것 등 

많은 상황들을 나누고 그에 따라 인간들이 어떤 원리를 행하게 되는지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키티온의 제놈

등의 스토아주의자들이 펼친 사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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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철학에서 경험론과 합리론이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이 가운데 경험론이란 어떤 것인지 

그 어원과 철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경험론의 어원 

 경험론에서는 두 가지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는 "겅험"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것은 라틴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 로마에서 활용으로부터 나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런의견들에 비추어 보면 설명과는 상반되고 실용적으로 경험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경험론과 철학원칙

 1) 영국의경험론

   영국의 경험론은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용어는 아닙니다. 17세기 초에 근대철학, 근대과학이 생기면서 그곳에서 

파생되었던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경험론을 처음 창시했던 프랜시스베이컨과 합리론을 처음 창시했던 르네데카르트

사이에서 생긴 차이점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세대인 토머스홉스, 바뤼흐스피노자는 

각자 경험론자, 합리론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조지버클리, 데이비드흄, 존로크 등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시대에 

경험론을 주로 했던 주창자였으며, 존로크가 경험론의 입장을 일반적으로 집대성하였고 이것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합리론의 응답

 17세기 초중기에 대륙의 합리론 응답으로, 존로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들은 오직 아포스테리오리하다며 

 경험으로부터 기반을 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로크의 견해는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이 감각적인 인상으로 파생되고 

그 경험이 쓰이며 백지라고 하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관념은 반영, 감각 등 두 가지의

원천이 있는데요. 두 가지의 구별을 복합적인 관념, 단순한 관념등에서 만들어집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가 없으며 종 된 성질, 주된 성질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주된 성질에 대해서는 객체에 

필요하며, 특별한 주된 성질 없이는 객체가 그것일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박은 원자론적 구조가 가진

배열을 통해 수박이 됩니다. 하지만 수박이 가진 구조가 달라진다면, 그것을 더 이상 수박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종 된 성질에 대해 주된 성질로부터 인식되는 정보입니다. 수박은 다양한 크기, 색깔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수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된 성질에 대해 객체가 무엇인지 결정하게 되고 종 된 성질은 

그것을 정의하게 됩니다. 

  3) 주관적 관념론

  아일랜드의 주교인 조지버클리는 로크가 펼친 견해가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로크의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사물이란 인식하게 된 결과로써 오직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버클리가 펼친 경험론은 그 이후 주관적인 관념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회의주의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인 데이비드흄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실체를 인정했던 로크의 비판에 대답하며 

경험론을 새롭게 이동시켰는데, 이것이 회의주의입니다. 흄은 모든 지식이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를 유지하였고, 이 견해가 일반 철학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흄은 로크의 논증에 대해 개연적인 것, 논증적인 것으로 구분하였는데요. 논증에는 증거와 검증된 것을, 개연적인 것들도

포함하여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흄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에 대해 관념의 관계이며,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두 가지의 범주로 해석하였습니다. 논리학적인 전제와 수학적인 전제는 첫 번째 예시로 들었으며, 세계를 향한 우연히 이루어진 관찰은 두 번째 예로 들었습니다. 두 번째 예시를 보통 해가 동쪽에서 뜬다 이 같은 논리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관념들은 인상으로부터 파생

된다고 합니다. 흄은 인상이란 우리가 보통 감각이라고 일컫는 것과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인상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념은 감각이 가진 희미한

복제로서, 모든 지식과 자연들이 가진 세계가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믿음까지도 이성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축적된 감각적 경험 덕분에 발전되었으며, 우리 몸에

축적된 습관이 내놓은 결과라는 주장도 함께 펼쳤습니다. 

 

 3. 경험론 이론

 경험론이란 철학에서 시작된 감각이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증거들, 그 증거들로부터 파생된 지식을 강조하게 되는 

이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라고 일컫는 인식의 원천을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추구하게 되는 것들과는 큰 대립이 

있습니다. 경험론에서는 인식론이라고 알려진 인간이 가진 지식, 그것과 관련된 학문가운데 가장 널리 퍼지게 된 관점

이기도 합니다. 경험론에서 관념이 생긴 형성과정, 생득관념, 관습 이런 것보다 증거와 경험, 감각이 가진 지각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맥락에서는 과학철학이 가진 경험론이 있습니다. 과학철학의 증거는 과학적인 지식과 실험에 토대를 두고 

관점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모든 가설과 이론들이 연역적 추론, 계시, 직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생기는 기존관찰에 반하며 검증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이런 내용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이 가진 힘이란 완전하게 방법론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으로서 현대사회와 근대사회를 통틀어 빠질 수 없이 

중요한 학문이며 앞으로도 큰 발전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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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는 다양한 하위분류가 존재하는데요. 

그중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끊임없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미술사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미술사학의 역사 

 미술은 인문학에서 뛰어나게 가지고 있는 전통, 예를 들어  고대의 이집트와 그리스, 중국과 로마, 메소포타미아 

메소아메리카, 인도 등과 같은 고대의 문명들 중 하나의 문학인 미술에서부터 기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신체적인 형태, 근육과 자세에 대한 숭배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기술들을 개발하고 또 고안해 왔습니다. 고대의 고마 미술은 인간이 이상화된 신들을 

묘사하였는데, 그 특유의 구별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제우스의 천둥번개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배하였던 중세시대의 고딕미술과 비잔틴 미술은 실체적인 가치로서의 귀환을 의미하였고, 이러한 것들의

전환은 인간이 신체의 풍경에 대해 삼차원적인 실제성을 보여주게되는 예술의 양식으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동양의 미술은 일반적으로는 서양의 중세에 미술과 유사하게 작업되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무늬를 가지고 부분적인

색채와 농도를 가졌는데요. 이는 빛, 그림자, 반사 등에 일어나는 색채의 변주와는 다르게 붉은색 관복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붉은색을 사용하고, 물체가 가지는 담백한 색채를 의미하는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티베트, 인도,

일본에서 보여주는 미술에서 뚜렷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미술은 도학상을 금지하였고, 기하학을 통하며 종교적으로 관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물리적, 합리적인 확실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학을 통한 새로운 발견에 

의한 것 이외에 미증유의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산산이 깨진 19세기의 계몽주의에 따라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증가하였던 세계적 교류들은 서양의 미술속에 또 다른 문화들에게도 동등하게 영향력을 주기도 했습니다.

 

 2. 미술사학 매체의 종류

  1) 그림

  여러가지 도구들과 기술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도구를 가지고 캔버스에 압력을 가하고 

표시하며 도구를 움직이는것들을 모두 포함하는데요. 여기에 쓰이는 도구들은 연필과 펜, 잉크, 크레용, 파스텔, 숯, 

색연필, 붓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디지털 도구들도 사용됩니다. 

 그림에서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는데, 선 그리기와 교차해칭, 점화, 뒤섞기 등으로 분류되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이

있는 사람을 화가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2)회화

 회화란 용기 안에 담긴 안료와 또 다른 접착물을 종이나 캔버스, 벽등과 같은 면에 바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예술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표현하는 행위자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구도와 그림, 미적인 부분등을 고려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화는 영적인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데요. 이러한 종류는 성당에 있는 

신화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 색

 음악에서는 듣고 말하는 소리가 필수입니다. 그림체에서는 색이 필수적입니다. 색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심리적인 영향들이 색 아래에 놓아져 있기 때문에 , 문화의 관점에서 색에 따라 

파악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검은색이 애도의 뜻을 지닌다고 알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흰색이 애도의 색상일 수도 있습니다. 칸딘스키, 아이작뉴턴, 괴테를 포함하여 많은 화가, 작가, 이론가,

과학자들은 모두 각자 스스로의 색 이론을 써왔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색상과 같은 것에 대한 일반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빨강의 

스펙트럼은 폭넓게 펼쳐져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에서의 다조, 내림 다죠와 같이 모든 음들은 기준이 있습니다. 

 또한 색은 팬톤시스템의 목적으로 인쇄와 디자인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인한 공식적인

정식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화가들은 콜라주와 같은 부분을 예를 들어, 회화에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을 크게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큐비즘과 함께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엄격하게 그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부의 화가들은 회화적인

질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밀짚과 시멘트, 모래 등과 같이 각기 다른 재료들도 넣어왔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화가 들고 

장 두부펫, 안셀름키퍼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근대와 현대의 미술은 역사적인 기교를 넣은 것에 가치를 두었던

개념에 대하여 옹호하는 부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에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시각에서는 진정한 미술들의 형식은 그 안에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술이란 사라질 수 없는 인문학의 한 종류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회화나 색표현, 그림체 들이 

달라지고 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고대의 미술 표현 화가들이

현시대에 더욱 각광받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술을 표현함에 있어 많은 분들이 각자의 시각을 가진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 낼 수는 없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섬세한 기술로 표현하는 기법 또한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는 있지만,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인문학 가운데 미술사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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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 하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철학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분야인데요. 오늘은 스콜라철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스콜라주의

 스콜라는 여유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변형할 때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낱말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은 학파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9세기~15세기 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신학을 통한 

철학적인 사상을 일컫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철학을 모두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콜라철학은 기독교가 가진 신학의 바탕 안에 있는데, 그렇기에 일반적인 철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진리탐구나 인식 등의 문제를 신앙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에서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부분을 문제로 다루었는데, 이 부분에서 스콜라의 철학인들은 

이 부분을 단순히 연구하지 않았고,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부분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논리학을 발전하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 스콜라주의의 역사 

  1) 게르만민족 이후 

   게르만 민족이 이동한 이후 유럽은 문화가 부진하게 되는 시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때의 문화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어느 정도는 유지되게 되었는데요, 이동안 프랑크왕국이 발전하였으며 

  카를대제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유럽을 거의 통일하게 됩니다. 카를대제를 통해 시작하게 된 학예는 

 중세 유럽을 최초로 문화개화를 하게 된 카롤링거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카를대제가 가진 본래의 의도는 성직자들이 교양을 높여 올바른 기독교으 신앙을 잔파 하려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을 위하여 처음에 라틴어 습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중세 초기에 섬나라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가 대륙에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2) 카롤링거 르네상스 후기 

  이 시기에는 사상가로서 고트샤르크와 스코투스에리우게나를 들 수 있습니다. 

 고트샤르크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이단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논설을 둘러싸고 왕국에서 

 신학의 논쟁이 활발해졌고, 신의예정이나 자유의지 등의 문제들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신학도의 대체로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스코투스에리우게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구분론이라는 

철학서적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는 다시 침체하게 됩니다. 

  3) 베렌가리우스시개

  베렌가리우스는 투르출신입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고 성스러운 빵, 포도주 등은 예수가 가진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이성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이성을 악용하는 것은 반대하였습니다. 최초에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는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입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성서의 권위에 의하지 아니하며 이성에만 의거해 

논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을 내세우게 됩니다. 

 안셀무스의 선구적 활동을 통해 스콜라척학은 12세기에 촉진되었고, 13세기에는 높은 발전에 이르게 

 됩니다. 중세문화 최성기에 원숙 기를 이루었습니다. 

 

  3. 프란체스코회 학파 

 프란체스코회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유대철학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향도 있었는데 종자적인 원리나 조명설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지켰고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습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는 신학대전을 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경험적인 철학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스콜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대결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세계에서 의의가 매우 크게 되었습니다. 12세기 중기에 들어서며 그때 발견된 논리학에 이어서 자연학, 

형이상학등이 들어와 파리에서 읽히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자들은 교의와

모순되는 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저작의 주해 부분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령을 

받았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교수금지령을 받았지만,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내용연구가 필요했고 

그로 인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시대적 사정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반의 서양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아라비아 세력이 침략하는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사상적인 무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신과 영혼이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 속에는 심리학과 신학이 있었지만 자연학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결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철학은 신과 영혼에 국한되지 않았고, 만유의 세계를 포괄하고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등장한 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였고, 토마스의 철학 속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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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송에서 탄생한 철학가입니다. 전국시대에 

제자백과 가운데 묵가를 대표하는 위인이기도 합니다. 

1. 출신 및 생애 

 묵자의 묵이란 검다는 뜻입니다. 묵의 해석은 두 가지로 되는데요, 첫째는 묵자의 

살성이 검은색이었다는 것, 두번째는 묵자가 받은 형벌인 묵형을 말합니다. 

 살이 검다는것을 해석해 보면 살갗이 햇볕에 탔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비추어 보았을 때

묵자는 직접 노동하게 되는 농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묵형을 받았더라도 

묵형을 받은 범죄자들은 하층민 신분이었거나 하층민으로 전락해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묵자가 했던 주장인 통치자도 백성과 같이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분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생애에 대한 주장 

 많은 역사가들이 묵자가 겨우 관직에 올랐던 하급의 장인 계급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묵자의 부모는 그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키우지는 않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묵자는 송지방에서 잠시동안 관직을 하였지만, 그는 루지역의 사람이었습니다. 

 묵자 역시 공자처럼 전국시데에 통치국에서 관리의 위치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해 

운영한 학교를 유지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목수 묵자 

 묵자는 기계를 만드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곽을 에워쌀 수 있는 

구름사다리의 설계를 통해 바퀴가 달리면서 이동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묵자는 높은 관직까지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어시설에 대하여 전문기술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통치자들이 그를 찾게 되었습니다. 

 3) 철학자 묵자

 묵자는 초년기 때 유교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유교는 너무 운명론적이고, 장례와 축하에만 

공을 들이기에 서민들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일생동안 공자와 겨룰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기술자들과 장인들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묵자는 개인적인 이득과 

죽음과는 관계없이 그가 가진 열정이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묵자의 사상

 1) 겸애

 묵자는 사랑이 부족하기에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평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하다 보면 하늘이 가진 뜻과 일치하게 된다는 뜻의 겸애를 주장하였습니다. 

 겸애를 실행하는 방법으로 빈부의 격차가 없는 경제상의 평등을 강조하였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예약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치설로는 같은 뜻의 비전론이 있습니다. 

 겸애사상은 유가의 인, 불가가 가진 자비와도 유사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종교상의 색채는 민간의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보였다. 

 신분이나 관등, 직책의 상하관계에 대해 서열을 존중하였고 예절과 전통을 숭상하고 있는 

유가와도 상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겸애의 개념들은 기득권들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철학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2) 존비친소의 비판

 묵자의 사상은 존비친소의 규범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모두 

반대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공자의 철학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묵자는 존비친소의 사랑에 비판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가족 또한 본인의 가족을 대하듯이 

하라고 주장하는 겸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겸애사상은 아비도 몰라보는 집단이라는 단어로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묵자는 유교가 가진 허례허식이 백성들에게 이익을 저해하게 된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통해 유교를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3) 등용

 묵자의 사상을 보게 되면 상현은 유가가 가진 주장을 반박하였고 관리의 임용은 신분과 

직업에 구애받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며 이로 많은 이를 등용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묵자가 가진 겸애는 타국과 자국등의 차별을 없앴고 사람은 서로 널리 사랑하라는 설입니다. 

 이 사상은 묵자가 가진 사상의 결정체이고 공자가 통치자의 처지에서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일정 부분 통하였습니다. 

 비공은 전쟁이 불의하며 백성들을 해친다고 주장하였으며, 현대의 평화주의 이론과

공통점도 있습니다. 절용과 절창은 군주들이 가진 의례적인 사치에도 맞서는 것입니다. 

 

 

  3. "묵자"의 내용

 저서 "묵자"의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1) 친사부터 삼변까지의 7편을 말한다(묵가의 잡론집)

 2) 상현부터 비명까지의 23편을 말하며 묵가의 주요 사상이다.(이 책의 핵심)

 3) 경, 경설, 대취, 소취의 6편이며 이것은 표현의 논리와 말의 개념을 분석한 것이다. 

 4) 경주부터 공수까지의 5편을 말하며 개조묵자의 언행과 사저집으로서 공자를 논란한 

 비유편도 이곳에 들어있다. 

 5) 비성문이하에 11편이며 이것들은 묵자의 방어전술을 적은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도 3번의 류는 묵변이라고도 호칭됩니다. 광학과 역학, 기하학 등의 명제도 

포함하고 있는 중국고대가 가진 논리학의 일부분입니다. 또한 류는 성의 방어전술에 필요한 

기구와 설비, 자재의 제작 등을 만드는 법을 논한 부분입니다. 이것들은 묵자의 집단이 가진 

특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기도 합니다. 

 천지는 하늘이 뜻하는 것으로 인간사회의 정의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규범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동은 나라가 가진 상하가 일치하여야 하며, 천자가 행하고자 하는 것이 

하늘이 가진 뜻과 부합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비공은 전쟁이 불의하며 백성에게 하는 해로움을 주장하였고, 절창은 군주가 가진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입니다. 명기는 사람이 가진 사후의 영혼이 있는 실재를 강조하였고, 

그 상벌을 두려워하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상, 중, 하의 10론이 있었으나 일부가 분실되었고 현재는 23편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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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너무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동안 철학과 그에 관련된 토론으로 

일관하여 서양의 철학과 관련된 첫 번째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소크라테스 생애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산파였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초기에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석공기술을 배웠고, 천문학, 철학, 기하학 등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40세까지는 세번에 걸쳤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연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세계관에 불만을 품기도 했는데요. 

 아테네는 몰락기였고, 보수적이면서 귀족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시계가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객관적이면서 타당한 목적이 있는 철학을 수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 소크라테스의 사상 

 1) 영혼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자였습니다. 육체는 객관적으로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냥 껍데기일 뿐이며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영혼은

불멸하기에 인간은 영혼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진리를 통찰하는 데에는 방해당한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이성적인 사고로 기초했던 산파술로 여러 가지 오류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신념들에 기초하여 죽음에 대한 정의를 영혼이 

육체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 도덕론

 소크라시대가 생존했던 시대에서는 전반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부패했던 때였고, 

이 때문에 개인적인 윤리의 타락이 극심하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악덕은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덕은 이성적인 사고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성이 가진 부덕함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비판하였습니다. 악덕한 자들은 지식이 부족한 상태라고 

보았고, 이런 의미가운데에서 냉소적인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행합일론은 그가 도덕적,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는 절제를 추구하였고, 자식의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선을 중시하였고 그리하여 토론과정에서도 그와 관련된 많은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런 관점들은 스토아학파에 의하여 그의 사후에 계승되었습니다. 

 3) 질문방법

 소크라테스는 구두의 언어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구두언어는 지의 매개 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언어의 운송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구두언어란 현대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단순한 규칙이 있는 음파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발화자의 사유를 어떤 오류도 없이 내보내고, 듣는 사람의 사유에 영향을 주게 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사람과 토론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 즉각적으로 답을 주지 않고 거꾸로 다시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진 질문에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4) 변론과 크리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에서 철학을 포기하게 된다면 석방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더라도

본인이 철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명령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이상의 철학적인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였고 그를 통해 의사결정을 

한 여러 가지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본인에게 독배를 내렸던 

법률을 보고 본인의 국외추방을 제의하지 않았고, 소극적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 뒤늦게 훼손할 

수는 없다며 크리톤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가진 이성적인

논법을 구사하지 않았고, 정서적이며 감성적인 모습으로 설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힘든 책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사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저서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만인 중에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신이 한 신탁에 대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여러 군데에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또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였고, 잘못된 판단들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옳게 하는 판단으로 

유도하였는데 이것을 바로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그는 합리주의자였고, 초경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이몬의 소리 또한 경청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덕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다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윤리상의 개념을 알게 하기 위해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 때문에

고발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도덕적인 성격으로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기에 

인류의 최대 교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본받은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철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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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인 자연과학. 

그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고대의 과학

 1)천문학과 역법 

고대문명에서는 천체를 관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달력을 제작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지혜의 여신인 이난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재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시간을 재보기 위해 해시계의 한 종류인 그노몬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고대의 이집트에서는 큰개자리 시리우스를 관찰하고 1년을 계산하였습니다. 시리우스가 해뜨기 

전에 동쪽하늘에 나타나는데 5월이되면 나일강이 범람하였습니다. 나일강은 고대 이집트의 농업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계절적인 계산이 매우 중요했는데요.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1월을 30일로 

하였고 12개월을 1년으로 계산하였습니다. 이집트의 달력여는 윤년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점차 흐르고 

달력과 실제 계절이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2)지도의 제작 

 고대에는 다양한 지도가 제작되었는데요. 바빌로니아에서 점토판에 그린 지도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지도제작은 고대의 그리스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서구에서 최초로 

지도를 제작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대의 로마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도로를 표시한 

지도까지 제작하였습니다. 라인강까지 모든 위치와 주민들을 기록한 도로망을 표기하였습니다. 

 3) 생물학 

 고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로 해부학 구조를 연구하고 생물학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역사"와 같은 다양한 생물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4) 역학과 건축 

 메소포타미아에서 피라미드와 같이 고대석고 건축이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의 건축물들은 

동력이 사용되지 않았고 단순한 기계의 원리를 기초로 세워진 것들입니다. 고대로마의 

건축공법 중 대표적인 것은 아치형 태이며, 이는 무게를 여러 군데로 분한 하여 지탱하게 하는 

지식이 사용되었습니다. 

 

2. 중세의 과학 

 1)중세의 상황 

 고대 로마가 붕괴되자 서부의 유럽에서 교육제도가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학을 우선시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렇기에 학문은 종교와 관련한 수단으로 작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2) 르네상스 과학 발달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를 맞아 경험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갈릴레오갈릴레이는 

많은 실험을 하였고 마찰, 관성, 중력 같은 과학적 현상도 관찰하였습니다. 또한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관측하고 연구하였습니다. 

 3) 항해술과 지리학 

 중세에는 항해술이 발전하고 지리학도 확장되었습니다. 15세이게 명나라에 있던 정화는 인도양을 

항해하며 무역의 판로를 개척하였습니다. 정화가 하는 항해는 고대 인도쪽의 무역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었는데요. 이러한 항해로 지리적인 인식이 크게 

확장되었고, 지리학역시 큰 발달을 이루었습니다. 

 

3. 근대의 과학

 1)과학의 혁명 

 17세기 이후에 유럽에서 자연주의, 경험주의 확산이 이루어졌습니다. 검증된 지식을 인정하게 되는 

풍토가 조성되었고, 이를통해 과학적인 방법론이 수립되기도 했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고전의 역학을

정립하고 지구공전궤도와 같은 업적이 생기면서 천문학, 물리학, 화학 같은 학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의 과학발전을 과학혁명이라고 하게 됩니다. 

 찰스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는것이라는 진화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다윈의 이런 이론들은 

기독교 등과같은 종료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현대 이론으로 크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레고어 멘델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20세기 초에 들어 여러 과학자들을 통해 

재발견되었습니다. 

 2)과학의 그림자 

  근대의 과학발전은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인 시장으로 연결해 주었습니다. 인류는 이를 통해 빠르게 

물자를 거래하였고,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 시기의 발전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4. 현대의 과학 

 20세기에 들어선 과학을 현대과학이라 합니다. 현대과학은 아주 세분화되었고 하위에 전문적인 

학문들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1) 우주탐사

 20세기 이후에 현대사회에서는 우주탐사 시대가 열렸습니다. 인류는 달을 탐험하기위해 노력하였고 

망원경을 궤도에 띄워 외계세계를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2) 유전학의 발달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은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유전성 질환에서의 유전자가 하는 역할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게놈지도가 완성되기도 했습니다. DNA의 구조는 복제와 유전 형질의 관련성을 암시하기도 

하였습니다. 크릭과 왓슨은 이것의 공로로 노벨생리학, 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3) 핵에너지의 사용 

 물리학의 발전으로 핵에너지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되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연구되고있던 

방사능 물질들이 핵융합과 핵분열의 조작을 가능하게 만든것인데요. 이는 보고 과학자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플루토늄과 같은 물질들을 합성하였습니다. 핵물리학은 핵발전소의 지식과 같은 평화의 

분야에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핵폭탄과 같이 무기를 초월하게 되는 파괴력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과학이 점자 발전되고 있다는 것을 점증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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