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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연구는 매우 광범위한 교육기준이며,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음악, 산술, 천문, 기하와 함께 수사, 논리, 문법 등 일곱 가지의 자유로운 인문학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기술들은 중세시절 교육에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인문학은 전통분야로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인문학의 하위 분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고전학

 서양의 전통적인 학문 가운데 고대의 문화와 로마문화로 불리는 고전학이 있습니다. 

고전의 연구는 인문과학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동안에는 중요성이 감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같은 문학가운데 고전적인 관념들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고전은 세계의 중요한 문명 가운데에서 집필되어진 기본적인 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역사학 

 역사란 체계적인 과거라고 볼수있는 큰 정보의 하나입니다. 학문분야의 이름가운데 역사학은 사회와 인간, 

제도와 흐름에 따라 차츰 변해왔습니다.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은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사고 기술을 모두 알고 있다고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연구는 인문학에서는 한가지 분야로 간주되어 왔는데요. 현대의 역사학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연대디가 초점적으로 될때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3. 언어

 언어는 인간이 발생시킨 최고의 정보체계이며, 의사소통수단이 되었습니다. 고전과 현대의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문학의 뼈대를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로 언어학과 사회과학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과학으로 언어학의 역사는 아주 길지는 않습니다. 19세기에 언어의 역사학이 중심을 이루었고,

20세기 이후에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이해하는 관점도 생겨났습니다. 이후 언어의 변화들은 인문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4. 음악사학

 음악은 악보라는 종이로 기록된 시간예술이며 소리예술입니다. 인간은 예술과 이성, 감성이 조화되는 산물이므로 

음악과 역사에 대한 탐구를 필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음악사학은 고대그리스시절부터, 동양에서는 

중국, 인도 등에서 연구되어 왔고, 가장 오랜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사학은 그리스 시대에 4과에 포함

되어있었으며,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근대과학과 인문학으로도 발전되었습니다. 

 음악사학은 동양음악사학, 서양음악사학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음악과 경제, 정치, 사회 등의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음악연주는 실기영영이기에 학문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를 예술로 재현하는 부분은 

학문의 영역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5. 철학 

 인문학의 기본뼈대라 볼 수 있는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은 고대그리스 시절부터 지혜로운 사랑을 의미했고 

전통적으로 세계와 인간, 현상가치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철학은 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제나 개넘, 관계에

대한 언어철학, 논리학등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고대의 필로소피아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 있는 지혜라는 단어는 인간과 세계를 가리키는 지식을 말합니다. 가치관과 인생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철학은 어떤 문화에서도 깊이 존재되어 왔습니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도 철학에 대한 지혜는 발견

되어왔습니다. 서구화가 되면서 철학이란 서양철학의 일반을 지칭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학 자체로서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마누엘칸트는 고대의 그리스 철학이 윤리학과 자연학, 논리학의 세 가지 분류로 나뉜다고

설명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물리학과 심리학, 인공지능, 언어학등과 같이 개별적인 학문분야로도 나뉘게 되었습니다. 

 

6. 종교학

 많은 역사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에 대해 신석기 시절부터 시작하여 탐색합니다. 이 시절에 종교적으로 가졌던 믿음은 

모계신, 하늘신에 대하여 숭배하고 해와 달도 신으로서의 숭배를 시작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동양,서양 양쪽으로부터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나타났습니다. 시간은 점차 흘렀고, 중요한 신앙들 

가운데 일부인 불교와 인도 힌두교,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와 같이 곳곳에 새로운 종교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동양 쪽에서는 세개의 유파가 중국인들의 지배적인 사상이었고,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도가와 유가, 법가가 그 세 가지 사상입니다. 유교의 전통은 경지에 다 달았고 법의 강제성이 아닌 전통을 지키는 모범과

권위를 정치도덕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서양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대표되고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중동과 유럽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하나로 공통된 셈족의 전통이 만들어낸 종교들입니다. 특히 꾸란에서는 예언자이며 창세기 20장

7절에서 예언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와 히브리성경에서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장로의 하나로 아브라함을 

신봉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조사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규모의 종교로 만들어진 커다란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일반적인 종교와 세계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의 절반에 해당하게 되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도 포관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서 종교학은 어느새 큰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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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철학 하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철학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분야인데요. 오늘은 스콜라철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스콜라주의

 스콜라는 여유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변형할 때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낱말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은 학파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9세기~15세기 동안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신학을 통한 

철학적인 사상을 일컫고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철학을 모두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콜라철학은 기독교가 가진 신학의 바탕 안에 있는데, 그렇기에 일반적인 철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진리탐구나 인식 등의 문제를 신앙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에서 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부분을 문제로 다루었는데, 이 부분에서 스콜라의 철학인들은 

이 부분을 단순히 연구하지 않았고,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부분 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계승하여 논리학을 발전하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 스콜라주의의 역사 

  1) 게르만민족 이후 

   게르만 민족이 이동한 이후 유럽은 문화가 부진하게 되는 시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때의 문화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어느 정도는 유지되게 되었는데요, 이동안 프랑크왕국이 발전하였으며 

  카를대제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유럽을 거의 통일하게 됩니다. 카를대제를 통해 시작하게 된 학예는 

 중세 유럽을 최초로 문화개화를 하게 된 카롤링거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카를대제가 가진 본래의 의도는 성직자들이 교양을 높여 올바른 기독교으 신앙을 잔파 하려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을 위하여 처음에 라틴어 습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중세 초기에 섬나라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가 대륙에 이식되기도 했습니다. 

  2) 카롤링거 르네상스 후기 

  이 시기에는 사상가로서 고트샤르크와 스코투스에리우게나를 들 수 있습니다. 

 고트샤르크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이단의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논설을 둘러싸고 왕국에서 

 신학의 논쟁이 활발해졌고, 신의예정이나 자유의지 등의 문제들이 논의되기도 했습니다. 

 신학도의 대체로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스코투스에리우게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구분론이라는 

철학서적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문화는 다시 침체하게 됩니다. 

  3) 베렌가리우스시개

  베렌가리우스는 투르출신입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고 성스러운 빵, 포도주 등은 예수가 가진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이성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이성을 악용하는 것은 반대하였습니다. 최초에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는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입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성서의 권위에 의하지 아니하며 이성에만 의거해 

논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을 내세우게 됩니다. 

 안셀무스의 선구적 활동을 통해 스콜라척학은 12세기에 촉진되었고, 13세기에는 높은 발전에 이르게 

 됩니다. 중세문화 최성기에 원숙 기를 이루었습니다. 

 

  3. 프란체스코회 학파 

 프란체스코회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유대철학의 이론을 많은 부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경향도 있었는데 종자적인 원리나 조명설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지켰고 보수적 성향을 유지했습니다. 

 헬즈의 알렉산데르는 신학대전을 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경험적인 철학전체를 이해하였습니다. 

 

  4.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스콜라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대결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세계에서 의의가 매우 크게 되었습니다. 12세기 중기에 들어서며 그때 발견된 논리학에 이어서 자연학, 

형이상학등이 들어와 파리에서 읽히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자들은 교의와

모순되는 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저작의 주해 부분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령을 

받았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교수금지령을 받았지만,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내용연구가 필요했고 

그로 인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시대적 사정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기반의 서양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아라비아 세력이 침략하는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사상적인 무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신과 영혼이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 속에는 심리학과 신학이 있었지만 자연학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결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철학은 신과 영혼에 국한되지 않았고, 만유의 세계를 포괄하고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등장한 이가 토마스 아퀴나스였고, 토마스의 철학 속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함께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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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송에서 탄생한 철학가입니다. 전국시대에 

제자백과 가운데 묵가를 대표하는 위인이기도 합니다. 

1. 출신 및 생애 

 묵자의 묵이란 검다는 뜻입니다. 묵의 해석은 두 가지로 되는데요, 첫째는 묵자의 

살성이 검은색이었다는 것, 두번째는 묵자가 받은 형벌인 묵형을 말합니다. 

 살이 검다는것을 해석해 보면 살갗이 햇볕에 탔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비추어 보았을 때

묵자는 직접 노동하게 되는 농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묵형을 받았더라도 

묵형을 받은 범죄자들은 하층민 신분이었거나 하층민으로 전락해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묵자가 했던 주장인 통치자도 백성과 같이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분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생애에 대한 주장 

 많은 역사가들이 묵자가 겨우 관직에 올랐던 하급의 장인 계급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묵자의 부모는 그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사랑으로 키우지는 않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묵자는 송지방에서 잠시동안 관직을 하였지만, 그는 루지역의 사람이었습니다. 

 묵자 역시 공자처럼 전국시데에 통치국에서 관리의 위치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해 

운영한 학교를 유지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목수 묵자 

 묵자는 기계를 만드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곽을 에워쌀 수 있는 

구름사다리의 설계를 통해 바퀴가 달리면서 이동할 수 있는 다양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묵자는 높은 관직까지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어시설에 대하여 전문기술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통치자들이 그를 찾게 되었습니다. 

 3) 철학자 묵자

 묵자는 초년기 때 유교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유교는 너무 운명론적이고, 장례와 축하에만 

공을 들이기에 서민들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일생동안 공자와 겨룰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추종자를 모았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기술자들과 장인들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묵자는 개인적인 이득과 

죽음과는 관계없이 그가 가진 열정이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묵자의 사상

 1) 겸애

 묵자는 사랑이 부족하기에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평등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하다 보면 하늘이 가진 뜻과 일치하게 된다는 뜻의 겸애를 주장하였습니다. 

 겸애를 실행하는 방법으로 빈부의 격차가 없는 경제상의 평등을 강조하였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예약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치설로는 같은 뜻의 비전론이 있습니다. 

 겸애사상은 유가의 인, 불가가 가진 자비와도 유사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종교상의 색채는 민간의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보였다. 

 신분이나 관등, 직책의 상하관계에 대해 서열을 존중하였고 예절과 전통을 숭상하고 있는 

유가와도 상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겸애의 개념들은 기득권들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철학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2) 존비친소의 비판

 묵자의 사상은 존비친소의 규범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모두 

반대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공자의 철학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묵자는 존비친소의 사랑에 비판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가족 또한 본인의 가족을 대하듯이 

하라고 주장하는 겸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겸애사상은 아비도 몰라보는 집단이라는 단어로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묵자는 유교가 가진 허례허식이 백성들에게 이익을 저해하게 된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통해 유교를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3) 등용

 묵자의 사상을 보게 되면 상현은 유가가 가진 주장을 반박하였고 관리의 임용은 신분과 

직업에 구애받지 않고 문호를 개방하며 이로 많은 이를 등용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묵자가 가진 겸애는 타국과 자국등의 차별을 없앴고 사람은 서로 널리 사랑하라는 설입니다. 

 이 사상은 묵자가 가진 사상의 결정체이고 공자가 통치자의 처지에서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일정 부분 통하였습니다. 

 비공은 전쟁이 불의하며 백성들을 해친다고 주장하였으며, 현대의 평화주의 이론과

공통점도 있습니다. 절용과 절창은 군주들이 가진 의례적인 사치에도 맞서는 것입니다. 

 

 

  3. "묵자"의 내용

 저서 "묵자"의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1) 친사부터 삼변까지의 7편을 말한다(묵가의 잡론집)

 2) 상현부터 비명까지의 23편을 말하며 묵가의 주요 사상이다.(이 책의 핵심)

 3) 경, 경설, 대취, 소취의 6편이며 이것은 표현의 논리와 말의 개념을 분석한 것이다. 

 4) 경주부터 공수까지의 5편을 말하며 개조묵자의 언행과 사저집으로서 공자를 논란한 

 비유편도 이곳에 들어있다. 

 5) 비성문이하에 11편이며 이것들은 묵자의 방어전술을 적은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도 3번의 류는 묵변이라고도 호칭됩니다. 광학과 역학, 기하학 등의 명제도 

포함하고 있는 중국고대가 가진 논리학의 일부분입니다. 또한 류는 성의 방어전술에 필요한 

기구와 설비, 자재의 제작 등을 만드는 법을 논한 부분입니다. 이것들은 묵자의 집단이 가진 

특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기도 합니다. 

 천지는 하늘이 뜻하는 것으로 인간사회의 정의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규범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동은 나라가 가진 상하가 일치하여야 하며, 천자가 행하고자 하는 것이 

하늘이 가진 뜻과 부합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비공은 전쟁이 불의하며 백성에게 하는 해로움을 주장하였고, 절창은 군주가 가진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입니다. 명기는 사람이 가진 사후의 영혼이 있는 실재를 강조하였고, 

그 상벌을 두려워하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상, 중, 하의 10론이 있었으나 일부가 분실되었고 현재는 23편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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