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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너무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동안 철학과 그에 관련된 토론으로 

일관하여 서양의 철학과 관련된 첫 번째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소크라테스 생애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산파였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초기에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석공기술을 배웠고, 천문학, 철학, 기하학 등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40세까지는 세번에 걸쳤던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연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세계관에 불만을 품기도 했는데요. 

 아테네는 몰락기였고, 보수적이면서 귀족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시계가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객관적이면서 타당한 목적이 있는 철학을 수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 소크라테스의 사상 

 1) 영혼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자였습니다. 육체는 객관적으로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냥 껍데기일 뿐이며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영혼은

불멸하기에 인간은 영혼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진리를 통찰하는 데에는 방해당한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이성적인 사고로 기초했던 산파술로 여러 가지 오류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신념들에 기초하여 죽음에 대한 정의를 영혼이 

육체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 도덕론

 소크라시대가 생존했던 시대에서는 전반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부패했던 때였고, 

이 때문에 개인적인 윤리의 타락이 극심하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악덕은 무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덕은 이성적인 사고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성이 가진 부덕함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비판하였습니다. 악덕한 자들은 지식이 부족한 상태라고 

보았고, 이런 의미가운데에서 냉소적인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행합일론은 그가 도덕적,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하는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는 절제를 추구하였고, 자식의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선을 중시하였고 그리하여 토론과정에서도 그와 관련된 많은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런 관점들은 스토아학파에 의하여 그의 사후에 계승되었습니다. 

 3) 질문방법

 소크라테스는 구두의 언어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구두언어는 지의 매개 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언어의 운송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구두언어란 현대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단순한 규칙이 있는 음파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발화자의 사유를 어떤 오류도 없이 내보내고, 듣는 사람의 사유에 영향을 주게 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사람과 토론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 즉각적으로 답을 주지 않고 거꾸로 다시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진 질문에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4) 변론과 크리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에서 철학을 포기하게 된다면 석방을 해준다는 제안을 받더라도

본인이 철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명령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이상의 철학적인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였고 그를 통해 의사결정을 

한 여러 가지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본인에게 독배를 내렸던 

법률을 보고 본인의 국외추방을 제의하지 않았고, 소극적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 뒤늦게 훼손할 

수는 없다며 크리톤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가진 이성적인

논법을 구사하지 않았고, 정서적이며 감성적인 모습으로 설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힘든 책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3.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사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저서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만인 중에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신이 한 신탁에 대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여러 군데에 현명한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또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였고, 잘못된 판단들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옳게 하는 판단으로 

유도하였는데 이것을 바로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그는 합리주의자였고, 초경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이몬의 소리 또한 경청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덕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다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무지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윤리상의 개념을 알게 하기 위해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 때문에

고발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지적능력과 도덕적인 성격으로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기에 

인류의 최대 교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본받은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였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철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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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사상이나 철학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맹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맹자의 생애연대는 정확하게는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난 후 100년 정도 

후에 추나라인 산둥성지역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맹자는 원래는 노나라의 서장자 경보

후손이었는데요, 경보 아들인 오에 다다르자 가문을 새로이 세웠습니다. 

 이때 가문이 맹, 맹손, 중손씨로 불리었습니다. 

 기원전 408년에 제나라가 성성을 공격했습니다. 성성은 맹 씨 가문의 식읍이었는데, 이로 인해

맹 씨의 일가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추나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유로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2. 맹자의 활약 시기

  맹자가 주로 활약한 시기는 기원전 4세기를 기준으로 그 전반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인 금씨는 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합니다.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다고 하는데요. 이 사실이 전한 시기에 활동했던 학자인 유향이 지은 

열녀전이라는 곳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맹자는 공자의 고향이었던 노나라로 이동하여 공자의 손자였던 자사를 통해 육경을 

배웠습니다. 공자의 경우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천의 관념에 대해 발전하고 있는 

자사의 계통이었습니다. 

 맹자는 양주와 묵자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사상을 확립하였습니다. 이때는 제자백가 

시대였는데, 40세 이후에는 왕도정치와 인정을 주장하였습니다. 종횡가와 법가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과는 타협하지 않았다고 알려집니다. 은퇴 후인 60세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제나라에 체류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인접 국가였던 연나라에서 

 자지가 난을 일으켰고 그 사실을 제선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자지의 난을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3. 맹자의 사상 

   1) 저서 맹자 

    저서로 맹자를 저술하였습니다. 맹자 중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는 의문이며, 그의 제자들이 이것을 편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맹자의 사상의 하나는 

하늘애 대한 숭경, 그 정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 모두를 낳았고, 

그것의 피조물이 지배하게 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관련하여 인간본연이 가지고 있는 모습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늘이 가진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고, 하늘이 정한 법칙을 달성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맹자의 인간관입니다. 

  2) 성선설

 공자는 인과 예를 실천하고 있는 인간이 가진 주체성에서 덕성을 발견하였고, 맹자는 인간이

가진 하늘이 주는 목적에 대해 그것을 지닌 법칙성이라고 행각 하였습니다. 이를 인간이 가진 

본성이라 하였는데, 인간이 가진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맹자는 전통적 유산인 인간이 가진 지각을 초월한 참된 실재자에 대한 숭경으로 인간이 가진 

실천적인 계기를 통해 종교적인 기초를 닦았습니다. 

 3) 사덕

 맹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인, 의, 예, 지의 

사덕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은 측은한 마음,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그냥 넘기지 못하는 

마음이고 의는 불의불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증오하는 마음입니다. 예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마음을 뜻하며, 지는 옭고 그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시비의 마음으로 설명합니다. 

 4) 인의 세분화

 공자는 예를 실천하고 있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하여 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이란 공자가 

말하고 있는 인의 세분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인이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덕이라 

하였고, 특히 위정자에 의해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공자의 사고방식에 대해 이를 

계승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5) 오륜설

 덕목을 정리한다는 뜻에 사단설 이외에도 오륜설이 유명합니다. 오륜설은 인간관계를 정리할 때 

다섯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데, 부자유친, 부부유별, 군신유의,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맹자는 공자자 가진 덕치주의 사상에 대해 하늘이 만민을 낳았고 그 통치자가 유덕자를 

천자로 명한다고 하는 서경 이후에 천명관으로 이를 뒷받침하였습니다. 하늘이 신앙을 통해서 

정치권력이 가진 정통성에 기초를 준다는 사상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가진 의지는 민의 소리와 

천지의 승인으로서 알 수 있다는 민본주의의 요소도 부가되었습니다. 

 맹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전쟁과 노역을 하지 않았고, 민생이 안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또한 도덕교육을 행하였고 이를 통해 인륜의 길을 가르쳤습니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였고

심복하고 귀일 하다는 뜻의 성왕정치, 인정과 왕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주장이 바로 맹자의 왕도론입니다. 또한 서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은. 주 교체기에 있는 역성혁명

사상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정치적인 원리로써 하늘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은 공자보다는 

이 부분에서 앞서고 있습니다. 맹자는 주나라의 제후국 노나라의 출신으로서 은 주 교체기를 보는 

그의 관점은 주나라에 대한 건국의 당위성을 확고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민의에 대해 배반하며 인의에 대해 어긋났다고 해석했는데 이부분 역시 매우 주관적인 

부분입니다. 왕이 부도덕하면서 게으르다고 생각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의 논리라 볼 수 있고 맹자 본인이 주장하였던 군신유의의 법칙에 위배되기도 합니다. 

 맹자의 논리를 본다면 주공단의 명분이 없이 은나라의 후예의 무경에게 주나라가 망했어야지 

정의로운 것이라 여기며 역성혁명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성혁명의 사상은 쿠테타를 일으킨 세력에게는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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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춘추시대에 초나라의 철학자입니다. 후세에 대단한 철학자로 알려진 노자의 

철학사상으로 인문학 이야기 시작해 봅니다. 

 

 

1. 노자의 생애 

 노자는 허난정의 사람으로 춘추시대의 말기에는 주나라의 관리였고, 그 후에는 관직을 버렸습니다. 

 노자는 중국에서 우주가 가진 만물을 최초로 생각한 사람으로, 그가 발견했던 우주의 진리는 

 " 도 "라고 불리었습니다. 도를 중심으로 생긴 신앙을 도교라고 합니다. 노자는 우주의 만물이 이루어지는 

이치가 근본적으로 "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1) 도교

    도교는 관념이 조금 희박하고, 시대의 복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종교가 가진 특성상 

   이론을 보충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가의 논리가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를통해 도교와 도가사상은 관계성이 가까워졌습니다. 도교는 종교와 사상, 풍속등의 

   원리를 편하게 흡수하였고, 조절할 수 있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성장해 왔습니다. 

  2) 도가사상 

   도가사상은 도교가 조절하게 된 사상의 하나일 뿐이지, 원래부터 도교와 도가사상이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가사상은 도교가 논리를 받아들일 후에도 예술, 사상등의 방면에서 우수하게 작용하며 

  독자적인 전개가 펼쳐젔습니다. 현대 우리나라에서도 도교와 도가사상은 별개라는 연구가 

  수용되었습니다. 

 

  2. 노자의 사상 

   1)기본사상 

    도는 모양이나 성질이 없고, 없어지거나 변하지도 않으며, 어디에서나 항상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형태의 만물들은 "도"가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습니다.

   2)도덕경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 속에서 무위자연이라는 단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우주 속에서 근본이며, 진리의 하나인 도의 길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연 안에 있는 법칙에 

   수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무위자연 사상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은 문화와 풍속, 법률 등 인위적인 것들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사람이 가진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충족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후세에는 도교의 시조로 불리었고, 노장사상은 도가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유교와 더불어 중국의 정신 사상에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3. 노자의 인생관

   노자의 인생관은 "유약한자는 생의 도이다". 유약은 강가에 승한다.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상선은 물과 같아서 물은 흘러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렇기에 

   도에 가깝다는 인생관을 펼쳤다. 위 내용에서도 보이듯이 나를 내세우지 않으며 세상의 흐름에 따라 

   함께 하는 일을 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겸하부쟁이라 일컫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노자의 철학은 도의 본질, 현상계에서 생활하는 철학이다. 도는 만물을 생장시키는 반면, 자신의 소유로

   하지는 않는다. 또 만물을 형성시키고 있지만, 그 공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만물을 성장시키면서도 

   주재하지는 않는다. 등과 같은 사고의 말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고들은 만물의 형성과 변화가 

   원래 그렇게 되는 것이며 예정된 목적은 따로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습니다. 

 

  4. 노자의 여담

   1) 일부의 학자들은 노자가 실제 인물이 아닌, 주나라의 왕실문서에 전해지고 있는 

   처세술모음집이라 주장하고 있다.

   2) 노자의 사상적인 계승자로는 장자와 열자가 있다. 다르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크게 확대하여 보면 많이 다른 점은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장자는 노사의 중요한 사상가운데 

  상대주의를 극대화하였다. 

   3)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이때 노자는 위선자라는 

   단어로 공자를 비판했고, 공자는 노자를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칭송하였다. 한비자의 책을 보면 

   도가의 처세술에 대해 거론하면서, 유가의 고리타분한 내용을 비판하는 글도 보인다. 하지만 

   도가가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안겼던 것은 사실이고,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는 

   의견도 있다. 

   4) 도가가 서쪽방향으로 떠나 인도에 도착하여 펼쳤던 가르침들이 불교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 설은 노자화호설이라고 하는데, 불교가 중국 쪽에 들어왔던 시기에 이 설도 퍼졌다. 

    도교에서 도사들이 이를 두고 자신이 불교보다 더 높은 존재라는 근거로 삼았고, 불교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청정법행경이라는 위경을 지었다. 공자는 유동보살의 환생이며, 노자는

    가섭보살의 환생이라는 주장을 하며 삼성화현설을 소리 높였다. 노자와 석가모니의 사상을 다르기에   

    의미 없는 주장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노자의 사상은 공수신퇴, 무위자연 등이 핵심이고 석가모니는 팔정도와 사성제가 핵심이었다. 

     불교의 공사상은 노자와 비슷하였는데, 공 사상은 인도에 있는 불교 고유 사상이었으므로 

     노자와 불교를 구분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해석이 있었다. 

    5) 노자는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 같은 말을 하였는데, 말장난 같아 보이는 이 말을 한 이유가 

    책값이 비싸서 말을 외우는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중국어가 가진 

    특성과 더해지고 그로 인해 효과가 높아졌다. 번역되었던 노자의 말이 아닌 원문을 보면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보인다고 일컬어지고, 한국어로 해석할 때와는 느낌이 달라진다. 

    도덕경에서 진정한 노자의 말을 느껴볼 수가 있고, 이것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이에게는 

    한문으로 낭송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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