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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철학에서 경험론과 합리론이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이 가운데 경험론이란 어떤 것인지 

그 어원과 철학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경험론의 어원 

 경험론에서는 두 가지의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서는 "겅험"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것은 라틴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 로마에서 활용으로부터 나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런의견들에 비추어 보면 설명과는 상반되고 실용적으로 경험했던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경험론과 철학원칙

 1) 영국의경험론

   영국의 경험론은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용어는 아닙니다. 17세기 초에 근대철학, 근대과학이 생기면서 그곳에서 

파생되었던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경험론을 처음 창시했던 프랜시스베이컨과 합리론을 처음 창시했던 르네데카르트

사이에서 생긴 차이점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다음세대인 토머스홉스, 바뤼흐스피노자는 

각자 경험론자, 합리론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조지버클리, 데이비드흄, 존로크 등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시대에 

경험론을 주로 했던 주창자였으며, 존로크가 경험론의 입장을 일반적으로 집대성하였고 이것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합리론의 응답

 17세기 초중기에 대륙의 합리론 응답으로, 존로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들은 오직 아포스테리오리하다며 

 경험으로부터 기반을 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로크의 견해는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이 감각적인 인상으로 파생되고 

그 경험이 쓰이며 백지라고 하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관념은 반영, 감각 등 두 가지의

원천이 있는데요. 두 가지의 구별을 복합적인 관념, 단순한 관념등에서 만들어집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가 없으며 종 된 성질, 주된 성질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주된 성질에 대해서는 객체에 

필요하며, 특별한 주된 성질 없이는 객체가 그것일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박은 원자론적 구조가 가진

배열을 통해 수박이 됩니다. 하지만 수박이 가진 구조가 달라진다면, 그것을 더 이상 수박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종 된 성질에 대해 주된 성질로부터 인식되는 정보입니다. 수박은 다양한 크기, 색깔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수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된 성질에 대해 객체가 무엇인지 결정하게 되고 종 된 성질은 

그것을 정의하게 됩니다. 

  3) 주관적 관념론

  아일랜드의 주교인 조지버클리는 로크가 펼친 견해가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로크의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사물이란 인식하게 된 결과로써 오직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버클리가 펼친 경험론은 그 이후 주관적인 관념론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4) 회의주의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인 데이비드흄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실체를 인정했던 로크의 비판에 대답하며 

경험론을 새롭게 이동시켰는데, 이것이 회의주의입니다. 흄은 모든 지식이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를 유지하였고, 이 견해가 일반 철학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흄은 로크의 논증에 대해 개연적인 것, 논증적인 것으로 구분하였는데요. 논증에는 증거와 검증된 것을, 개연적인 것들도

포함하여 나누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흄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에 대해 관념의 관계이며,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두 가지의 범주로 해석하였습니다. 논리학적인 전제와 수학적인 전제는 첫 번째 예시로 들었으며, 세계를 향한 우연히 이루어진 관찰은 두 번째 예로 들었습니다. 두 번째 예시를 보통 해가 동쪽에서 뜬다 이 같은 논리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관념들은 인상으로부터 파생

된다고 합니다. 흄은 인상이란 우리가 보통 감각이라고 일컫는 것과 아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인상들을 세세히 기억하고 상상하게 되는 것이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관념은 감각이 가진 희미한

복제로서, 모든 지식과 자연들이 가진 세계가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믿음까지도 이성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들은 축적된 감각적 경험 덕분에 발전되었으며, 우리 몸에

축적된 습관이 내놓은 결과라는 주장도 함께 펼쳤습니다. 

 

 3. 경험론 이론

 경험론이란 철학에서 시작된 감각이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증거들, 그 증거들로부터 파생된 지식을 강조하게 되는 

이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라고 일컫는 인식의 원천을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추구하게 되는 것들과는 큰 대립이 

있습니다. 경험론에서는 인식론이라고 알려진 인간이 가진 지식, 그것과 관련된 학문가운데 가장 널리 퍼지게 된 관점

이기도 합니다. 경험론에서 관념이 생긴 형성과정, 생득관념, 관습 이런 것보다 증거와 경험, 감각이 가진 지각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맥락에서는 과학철학이 가진 경험론이 있습니다. 과학철학의 증거는 과학적인 지식과 실험에 토대를 두고 

관점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모든 가설과 이론들이 연역적 추론, 계시, 직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생기는 기존관찰에 반하며 검증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이런 내용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이 가진 힘이란 완전하게 방법론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으로서 현대사회와 근대사회를 통틀어 빠질 수 없이 

중요한 학문이며 앞으로도 큰 발전이 필요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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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알아가다 보면 스콜라철학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이 스콜라 철학가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방교회의 신학자이며 스콜라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토마스학파에서는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지요. 현재에도 그의 이름을 모티브로 한 연구소나 

학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토마스아퀴나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1) 출생과 사망  

  토마스아퀴나스는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리 근교의 로카세카성에서 란돌포의 아홉 남매 가운데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토마스아퀴나스의 사망은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49살이 되던 해, 어떤 이의 기록에서는

50세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소년기 

 토마스아퀴나스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토마스를 성베네딕트 수도회의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미래에 수도원장으로서 자라기를 바랐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어 되고, 수도사 수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수도원을 나온 후 토마스는 나폴리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당시의 필수적인 학문이었던 논리학과 수사학, 기하학, 음악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들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수도사들을 만남으로써 

그의 삶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원했던 부모의 기대를 버리게 된 것이지요. 

 귀족아들 출신으로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었던 토마스는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3) 파리대학교의 교수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교의 신학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평화롭지 않았고, 

교수들의 대립도 극에 다 달던 시절이었지요. 토마스의 취임강연은 수도회의 출신이었던 교수를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고

만에 하나 벌어질 폭력의 사태를 대비하여 프랑스왕이 보낸 군대가 배치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토마스는 파리대학교 사상 처음으로 교수직을 두 차례 역임하는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며 학생들도 올바르게 지도해야 했고, 성직자의 위치까지 있었으니 토마스가 가진 

압박감이 엄청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4) 말년

  토마스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끝난 후 나폴리로 향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소논문을 작성하고 서간문에 대하여 주해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끊임없는 집필작업에 전념하였으나 1273년 니콜라스 축일 미사 중에 충격을 받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주변이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 미사 이후 어떠한 계기로 토마스는 저작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명상 중에도 의식을 잃은 모습이 종종 보였고,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 눕거나 일어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부터 토마스의 건강상태가 많이 악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5) 사후

  토마스는 1274년 3월 7일 여러 명의 수도사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영면하였습니다. 

 당시 파리대학의 총장과 교수들은 이런 비통함을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요. 이 편지의 내용은 토마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토마스가 자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인 파리에 토마스를 묻어달라는 부탁도 함께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포사누오바의 수도원에서는 위대한 성인이었던 토마스의 시신을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토마스 사후에 여러 가지 이론들이 단죄를 당하는 안 좋은 일들도 벌어지고

했습니다. 또한 토마스가 여러 가지 문제에서 어울릴 만큼의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의 교황이었던 요한 22세는 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그때마다 기적들을 행한 것이었다

라는 말로 문제를 일출했다고 합니다. 

 

 2. 철학사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하였고 그것은 스콜라철학으로서 신앙과 이성 간의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존재론을 보면 신학의 특성을 이루고 있으며 실재적인 색채도 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과의 피조물 관계에 대해 존재의 유비를 사용하였고, 유비의 개념과 참여에 따라 차별을 가지고 존재를 파악하게 하는 

불가지론, 범신론의 위험도 피하였습니다. 본질적인 구조의 규정원리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가능태 개념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특히 아비체나에서 발견하게 된 본질과 존재에 대한 구별을 이용하였고, 독자적인 원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존재와 본질이 함께 일치하는 신존재가 필연성, 창조라는 관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신이 하는 존재의 증명에는 본체론적인 증명을 피했고, 경험을 토대로 주어진 사실부터 출발하여 첫 번째 원인인

다섯 가지의 길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악이 가진 문제는 선의결여의 관점으로부터 해석되었는데요. 

 인격의 단일성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그는 영혼이 유일형상성에 바탕과 중점을 두고 있는 인간학에 대해 전재하였습니다. 

이성적인 동물으로서 합성체인 인간에게는 이상작용, 의지작용이 있었으며 영혼은 인식하고 있는 작용의 원리이며

식물적, 동물적의 원리도 함께 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도덕록에서 모두가 가진 도덕은 신을 향한 이성, 피조물의 운동이며 여기여 대응하는 수단으로 윤리적인 행위는 

심리학으로 분석한다고 밝혔습니다. 도덕률이 영원법에 대한 반영이라고 보았고, 신이 향한 목적을 가진 존재론은 

그 안에서 파악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초월적인 것들은 이성의 소리가 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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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는 다양한 하위분류가 존재하는데요. 

그중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끊임없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미술사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미술사학의 역사 

 미술은 인문학에서 뛰어나게 가지고 있는 전통, 예를 들어  고대의 이집트와 그리스, 중국과 로마, 메소포타미아 

메소아메리카, 인도 등과 같은 고대의 문명들 중 하나의 문학인 미술에서부터 기초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신체적인 형태, 근육과 자세에 대한 숭배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기술들을 개발하고 또 고안해 왔습니다. 고대의 고마 미술은 인간이 이상화된 신들을 

묘사하였는데, 그 특유의 구별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제우스의 천둥번개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배하였던 중세시대의 고딕미술과 비잔틴 미술은 실체적인 가치로서의 귀환을 의미하였고, 이러한 것들의

전환은 인간이 신체의 풍경에 대해 삼차원적인 실제성을 보여주게되는 예술의 양식으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동양의 미술은 일반적으로는 서양의 중세에 미술과 유사하게 작업되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무늬를 가지고 부분적인

색채와 농도를 가졌는데요. 이는 빛, 그림자, 반사 등에 일어나는 색채의 변주와는 다르게 붉은색 관복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붉은색을 사용하고, 물체가 가지는 담백한 색채를 의미하는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티베트, 인도,

일본에서 보여주는 미술에서 뚜렷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미술은 도학상을 금지하였고, 기하학을 통하며 종교적으로 관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물리적, 합리적인 확실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학을 통한 새로운 발견에 

의한 것 이외에 미증유의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산산이 깨진 19세기의 계몽주의에 따라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증가하였던 세계적 교류들은 서양의 미술속에 또 다른 문화들에게도 동등하게 영향력을 주기도 했습니다.

 

 2. 미술사학 매체의 종류

  1) 그림

  여러가지 도구들과 기술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도구를 가지고 캔버스에 압력을 가하고 

표시하며 도구를 움직이는것들을 모두 포함하는데요. 여기에 쓰이는 도구들은 연필과 펜, 잉크, 크레용, 파스텔, 숯, 

색연필, 붓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디지털 도구들도 사용됩니다. 

 그림에서는 다양한 기술이 사용되는데, 선 그리기와 교차해칭, 점화, 뒤섞기 등으로 분류되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이

있는 사람을 화가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2)회화

 회화란 용기 안에 담긴 안료와 또 다른 접착물을 종이나 캔버스, 벽등과 같은 면에 바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예술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표현하는 행위자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구도와 그림, 미적인 부분등을 고려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화는 영적인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데요. 이러한 종류는 성당에 있는 

신화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 색

 음악에서는 듣고 말하는 소리가 필수입니다. 그림체에서는 색이 필수적입니다. 색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객관적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심리적인 영향들이 색 아래에 놓아져 있기 때문에 , 문화의 관점에서 색에 따라 

파악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검은색이 애도의 뜻을 지닌다고 알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흰색이 애도의 색상일 수도 있습니다. 칸딘스키, 아이작뉴턴, 괴테를 포함하여 많은 화가, 작가, 이론가,

과학자들은 모두 각자 스스로의 색 이론을 써왔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색상과 같은 것에 대한 일반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빨강의 

스펙트럼은 폭넓게 펼쳐져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에서의 다조, 내림 다죠와 같이 모든 음들은 기준이 있습니다. 

 또한 색은 팬톤시스템의 목적으로 인쇄와 디자인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인한 공식적인

정식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화가들은 콜라주와 같은 부분을 예를 들어, 회화에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을 크게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큐비즘과 함께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엄격하게 그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부의 화가들은 회화적인

질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밀짚과 시멘트, 모래 등과 같이 각기 다른 재료들도 넣어왔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화가 들고 

장 두부펫, 안셀름키퍼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근대와 현대의 미술은 역사적인 기교를 넣은 것에 가치를 두었던

개념에 대하여 옹호하는 부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에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시각에서는 진정한 미술들의 형식은 그 안에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술이란 사라질 수 없는 인문학의 한 종류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회화나 색표현, 그림체 들이 

달라지고 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고대의 미술 표현 화가들이

현시대에 더욱 각광받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술을 표현함에 있어 많은 분들이 각자의 시각을 가진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 낼 수는 없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섬세한 기술로 표현하는 기법 또한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는 있지만,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인문학 가운데 미술사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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