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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에서는 수사학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늘은 인문학의 한 분야인 수사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수사란 원래에는 말을 잘하는 기술로 불리었다고 하는데요.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목적들이 추가되게 됩니다. 

 

 

 1. 수사학의 목적 

 1) 명시적인 의미를 더한 묵시적인 의미가 가진 암시

 2) 문체적 언어, 문학어, 비유적 언어의 사용

 3) 동의와 설득, 납득 등의 창출

 4) 직설적인 의미부터 설정하고 이를 추리함

 5) 저자나 연사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 행위에 대하여 이유 등을 찾음

 

넬슨 등은 언어학, 역사학, 문학, 인류학 등이 경제학이나 정치학, 수학과 생물학등 모든 것이 

탐구가 주는 수사학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탐구의 수사학은 이런 방법론에 대해 여러 문맥 속에서 

탐구활동, 또 그 안에서의 언어들과 연결시켰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탐구가 주는 수사학이란 획일적인 횡포에 

대해 부정하고, 여러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강조하는 논리들과 공통점을 가지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는 인식론을 함께 공유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2. 수사학의 세기

 많은 이들이 수사학의 세기에 대해 20세기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란밸리프는인지수사학, 사회인식수사학,

 전자수사학, 전산의거수사학 등과 같은 여러 가지의 수사학을 규정하고 있었는데요.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남긴

수사학을 칭하는 말들은 다양합니다. 특히 비정초적인 세상에 대한 말이 생겨났는데요. 

 정초주의라는 것이 절대주의와 객관성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면 반정초주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에 입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것은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일시 전이고 개인적인 부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3. 제문론의수사학 

 메르에르의 주장에 따르면 여러 주장이 가진 수사학에서 하나만이 감춰져 있는데, 에토스와 파토스의 관계같이

로고스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가진 관계라는 것입니다. 논쟁의 대상이 하나의 문제를 통해서 개별화되며

수사에 대하여 생겨난 문제를 주체들 사이의 교섭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수사에 대해서 문제를 통해 진정되며 

시작된다 하여 문제가 가진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로운것과 옳은 것, 명예로운 것 등에 대해 말하였는데 이것들이 각각 심의형과 재판형,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이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1) 제문적 답들 

  문제의 발상으로서 답을 찾는 것은 제문적인 답 가운데 문제들을 추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수사학에서도 그렇지만 제문적 수사학에서 크게 강조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수사학적인 탐구를 시도하기 전에 답에 대해 문제의 제기로 보고 있는 제문론적인 접근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2) 언어학

 문학의 사조, 언어학의 이론 등은 새로 어떤 문제를 발견할 때 이 루어집닌다.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하는 연구가 전부는 아닙니다. 외국어에 대하여 그 문법을 언어학요소가 아닌, 번역의 요소로 접근하는 것 똫나 

하나의 연구입니다. 

 언어학적으로는 프랑스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어가 가진 문법들은 문장에 대한 설명이 많았고 

다른 언어의 이론을 잘 설명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전통문법이 가진 존재에 대하여 여러모로 부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구조주의의 언어학을 넘어서게 되었고 언어학의 혁명으로 생겨난 생성언어학도 본래의 

언어능력에 따라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 제기의 관점에서부터 접근하게 되면 구조주의는 언어의 차이라는 

문제를 통해 출발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대안

 크로스화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논증의 행위는 특정하게 된 어떤 주장의 사이에 명백해진 갈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갈등이 없다면 논증 또한 없고 질문도 없게 되며 새롭게 이야기할 주제도 없어집니다. 갈등이란 논증의 행위에서 

선행하는 것이고 논증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갈등에 대해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불일치가 결국 발견을 낳게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논증 발견에 관심을 갖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인데요. 논증의 행위에 대해 폭력에 대비하는 대안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다각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4. 수사학의 재발견

 우리가 수사학에 대해 재발견한다는 의미는 학문적인 탐구분야에 수사학을 받아들이겠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문적인 탐구에 대해 다양성과 불확실성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인데요. 메이에르는 이에 대해 

수사란 불확실한 상황과 그럴만한 상황 등등을 합리적인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메이에르의 이러한 관점들이 모든 필연성과 이성, 명증성 등이 철학과 단절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수사학에서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토마스쿤은 자연과학의 문학들 중 전문적인 청중들의 설득이 핵심적 인문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새로운 국학에 대해정의하고 이것들을 널리 알리게 되는 것이 새로운 과제라는 것입니다. 

수사학적, 제문론적 발견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로서 의미가 상승된다는 것입니다. 메리에르가 말한 질문의 수사학들은 

발견의 수사학에 하나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이성적인 수사학 등 여러 가지 수삭학들이 

생겨나게 되고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면 인문학의 담론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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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공자를 들 수 있습니다. 공자의 인망에 대해 해가 더해갈수록 높아졌다는 평이

있습니다. 큰 벼슬도 하게 되었으며 이 시대에까지 덕망 받고 있던 공자의 정치활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수장 공자

 공자는 공직생활 시 순장이 될 뻔했던 아이를 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순장이라는 풍습이 악하다는 것을 왕에게 고하였고, 결국 폐하게 됩니다. 또한 제나라의 경공과 회동하였고, 

공자의 뛰어난 전략으로 협상을 끌어냈습니다. 어떠한 전쟁 한번 없는 결과였습니다. 이 협상으로 노나라가 예전

잃게 되었던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권세가 높았던 삼환 씨에 대해 횡포를 찾아내고, 

이를 꺾기 위해 그들이 머무는 삼성을 없애는 계획도 추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도중에 중단되고 맙니다. 맹손과 숙손, 삼환 등을 이끄는 수장이었던 계손사의 경비를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 반란

 이 시기에 공산불뉴는 계손사와 삼환이 저지르는 횡포에 맞서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공자 또한 

삼환의 무리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고, 이로 인해 노나라를 바로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목표로 공자는

이미 일을 추진했었고, 도덕정치의 구현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여러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나라에서 공자의 제자였던 남궁도와 맹의자 등이 이를 만류하였고, 여러 가지 상황 또한 벌어지게 되어

공자는 단념하게 됩니다. 

 공자는 국정을 굳건히 하기 위해 권세를 계속 가지고 있던 계손사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이런 목표로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였으나, 성사직전에 매번 실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로 계손사의 눈밖에 나게 되고 

미움받게 됩니다. 결국 공자는 기원전인 496년도에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여러 병의 제자들과 

본인의 학문적인 기량을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군주를 찾기 위해 정처 없는 여정에 나서게 됩니다.   

 3. 도덕정치

 공자의 여정은 10여 넘이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성인이었던 공자에게도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어려운 세월이었다 전해집니다. 이 여정동안 생명에 위협이 생기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이런 어려움으로 

여행을 하며 만났던 은자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공자가 주장했던 도덕정치는 이동하며 머물렀던 모든 나라에서 외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왕은 

올바르게 가는 길보다는 쉬운 길을 택해 국력을 키우기를 바랐고, 천하를 헤울 부국강병만이 오롯한 목표

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 공자는 결국 자신이 택했던 학문적인 이상이 현실적인 정치상황에 실현되기는 

어렵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공자는 귀국하게 되고, 후학의 양성에만 힘쓰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이런 상황으로 공자의 정치적인 삶은 결국 마감하게 되고, 후배를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2막이 펼쳐지게 됩니다.  

 4. 정치관

 공자는 정치관에 대해 목표로 삼은 것이 있었는데요. 사회와 국가를 함께 끌고 갈 지도자창의 인사로 

완벽한 인성을 가진 군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자는 원래는 귀족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귀족은 한 나라에서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능력이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을 뜻했는데요. 

 공자는 이런 지위에 어울릴만한 사람을 찾고, 도덕적으로 인격이 있는지 인문적인 묘약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 분야로 뜻을 확대하여 인재육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군자를 양상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경자는 춘추시대 전에 민요와 가요 등을 편집했던 서적등을 통해서 

교범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노나라의 역사서적인 춘추를 편찬하였고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5. 관료생활

 공자는 회계의 출납직 위리를 거쳤고, 목장의 경영직 사직을 통해 관료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30세가 된

공자는 관리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지위도 얻었습니다. 또한 학문적으로 많이 성장하였습니다. 

 공자의 정치관으로는 법보다는 덕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이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할 때 사람을 우선으로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하는데, 주공이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시대처럼 평화롭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공자의 본국인 주나라에서 낙읍으로 돌아본 후 귀국한 공자는 각국으로 명망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점차 늘어났고, 그 수는 점점 늘어 3천 명이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공자를 눈여겨보았던 노나라 왕 소공이 그를 가까이 두려 애썼다고 합니다. 

 공자가 35세가 되던 때에 노나라의 권세가였던 삼환이 일으키는 난이 일어났습니다. 노 와의 소공은 

신하에게 쫓겨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공자 역시 그의 뒤를 따랐고 제나라로 이동합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여러 가지 진리를 가르치게 됩니다.  공자의 인품을 보고 경공은 공자를 흠모하게 

되었고, 곁에 두고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 때문에 위치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했던 제나라의 제상의 반대로 

무산되게 됩니다. 

 공자는 이런 일을 사유로 2년 후 귀국하게 됩니다.  이후 제나라는 노나랑 밀차를 파견하였고, 공자는 이를 

알아채 미리 화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삼환 씨의 세력은 꺽지 못했고, 여러 가지 연유로 크게 낙담하게 됩니다. 

 그 후 공자는 벼슬을 버렸고, 이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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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란 유럽에서 14세기~16세기에 문화가 부흥되는 혁신운동을 이야기합니다. 

이 시기에는 예술과 문화에 걸쳐 전반적으로 많은 것이 발달했는데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의 인문학과 문화에 대해 알아봅니다.  

 

 

 1. 성립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성립을 알아보면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세기까지의 이탈리아는 많은 무역을

했고 이를 통해 경제력을 길렀습니다. 베네치아와 밀라노 같은 큰 도시에서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으로 

교황과 영주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그때는 신도 인간과 같이 표현하였기에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를 부활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문학과 예술 전반에 나타난 이러한 기운을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피렌체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 후 

유럽의 많은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2. 미술의 부류

  1) 회화

 마사초가 회화의 르네상스 서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연주의적인 태도를 지녔고, 그 이후에 베로키오와

프란체스카의 원근법과 해부학으로도이어집니다. 알베르티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인간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회화와 건축등 다방면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인문주의자의 

큰 전형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라파엘로와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건축과 조각 등에서 많은 재능을 드러

내었습니다. 

  2) 조각 

 15세기 무렵, 중세의 본질을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조각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개념인 고전형식과 

사실표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고전예술에 대하여 르네상스시대의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해 만물의 척도로 

생각하였고 그러한 사실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휴머니즘은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하고 중세

시대에 예술을 장식하는 자연주의의 관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5세기에 시작된 자연과의 접근은 과학적이고 

분석적이기에, 신에 대한 존자보다는 자연을 위하고 기존에 있던 사실들을 연구하게 됩니다. 이것의 예로 

나체상을 들 수 있습니다. 

 3) 음악

 르네상스시대의 음악은 교황들의 많은 후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에 있던 성가대는 

전체 유럽에있는 성악가와 음악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중 유명한 사람으로 팔레스트리나와 프레를 

들 수 있습니다.  

3. 그외의 문화

 1) 인문주의

 르네상스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문주의성향이 강했습니다. 신이 중심이 되는 시대에서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지적인 흐름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탈리아의 중북부지역에 자치상태로 놓아져 있었다는 점과는 

꽤 관계가 깊습니다. 그 시기에 피렌체는 지중해의 무역으로 발전하였고, 토스카나지방의 중심지역이었습니다.

 14세기경에는 이슬람세계와 동로마제국, 교회등이 고전적인 문화권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2) 건축

 이탈리아에는 고대의 유물이 많았습니다.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로마 것들을 공부했고, 그것들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의 르네상스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시기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올리는것이 아주 힘든 작업이었는데, 그것을 성공하여 큰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나타나 르네상스의 건축을 계승했습니다.

 4. 메디치가문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절정이었던 곳은 로마와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의 대형 도시였습니다. 

 특히 예술가들가 학술이 많이 키워졌던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이 있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스포르차가문도

알려져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은 13세기에 피렌체 지역에서 은행업과 상업으로 성공했고, 교황청의 재산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재력을 크게 갖춘 가문이 되었습니다. 15세기부터는 르네상스의 사상과 과학, 예술등을 

폭넓게 후원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2년 동안 메디치가 문의궁전에서 지냈는데요. 그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고 합니다. 궁전에서 다양한 미술작품들을 감상하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5세기에 생긴

개혁으로 피렌체지역의 예술은 쇠퇴하였고, 프랑스가 전쟁을 함에 따라 스포르차가도 추방되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성베드로대성당이 건설되면서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로마가 약탈당한 이후 

에도 토스카나대공국, 베네치아공화국 등에서 미술을 활발하게 성장했습니다. 

 5. 르네상스의 혼란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전쟁이 있었고, 정치적인 싸움과 흑사병등 다양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황청과 궁정 등 일부에서만 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고, 보편적으로 마술과 미신들이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시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은 엉망이었고, 여러 군데 소국으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외국으로의 간섭이 심해지고 정치적으로 근대화가 지연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1600년대에 들어서 조르다노브루노가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우주에 대해 무한성을 주장했었는데, 

이단으로 몰리게 되어 이런 결과를 얻게 됩니다. 또한 갈릴레이는 종교적 인재판을 받았고 이런 상황을 

계기로 이탈리아에서는 과학적 연구를 하기가 점차 어려워 졌습니다.

 이 시기에 미술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들었고, 점점 북유럽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17세기에 들어서서는 로마의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되는 바로크미술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다시 한번

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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